제물은 간소하고 정갈하게

▲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우리나라에는 고유 명절이 둘이 있다. 음력으로 정월초하루 설날과 역시 음력으로 8월15일인 한가위 즉 추석이다. 필자는 독자여서 부모와 조부모까지만 차례를 모시고 그 위 조상은 안 지낸다.

사촌들이 있지만 그네들은 자기 부모(필자에게 삼촌)의 차사를 모시기에 우리집안은 나와 아들 손자 둘에 며느리가 전부다. 딸들이 둘이 있지만 큰 딸은 출가해 대전에 살고 둘째는 서울에 산다.

명절하면 의례 제물 차리는 게 문제다. 요즘은 많이 간소화됐지만 아직까지 제물을 준비하는 며느리들에겐 부담이 안 갈 수 없다. 때문에 필자는 며느리에게 매번 이른다. “제물은 간단히 차려라. 정성이 문제지 물질이야 그 다음이다”라고 하지만 차리는 쪽에서는 그게 아닌가 보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며느리에게 가짓수까지 알려주며 간소화를 요구했다. 과일은 밤 대추 배 정도면 되고 과자는 손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 주문했다. 나물 세 가지(시금치, 도라지나 고비, 무나 숙주나물) 하면 되고 햅쌀밥(뫼)에 탕이면 된다고 했다. 물론 포와 몇 가지는 시키지 않아도 장만했다. 이러다 보면 벌써 수십 가지가 된다. 명절 잔은 단잔이다. 사실 이것만 해도 여간 번잡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차례나 기제사를 제대로 지내기 시작한 것은 서민들(중인 천민)은 조선 말 대한제국 때 갑오경장 이후부터다. 그전에는 소위 양반(극소수)들만 제사를 지냈다. 시골의 경우 면단위  쯤에서는 진사급(요즘 면장이나 동장쯤의 벼슬) 이상자만 맘 놓고 떳떳이 조상 제사와 차사를 지냈고 그 이하는 양반 눈에 안 띄게 숨어서 지냈다. 그래서 고콜제사 얘기도 나왔다.

그래도 갑오경장의 개혁사상이 물결쳐서 “양반 조상만 조상이냐 서민도 같다”며 전 국민이 부모조상을 모시게 됐다. 여기엔 일제의 교묘한 문화정책이 한 몫을 했다. 즉 많은 백성들이 소수의 양반계급을 타파하자는 평등사상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이 점을 이용해 일본의 신문명과 개화기를 앞당겼다. 지금부터 불과 120여 년 전 일이다.

명절하면 의례 애들이 신명나는 날이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첫째 손자는 12살 6학년이고 둘째는 두 살 아래인 10살로 4학년이다. 문제는 늘 둘째로부터 발생한다. 추석 전날만 해도 두 형제가 한판 붙었다. 시비는 언제나처럼 둘째였다. 형은 내년에 중학생이 되기 때문에 의젓한데 둘째는 응석받이에다 짓궂어서 늘 말썽이다.

가만히 있는 형을 툭 치고 내뺀다. 한번은 참아주던 형이 두 번째는 같이 대항을 했다. 물론 지는 쪽은 둘째다. 시비도 먼저 걸고 결과도 혼나는 쪽이다. 이때 제 엄마(며느리)는 일심 재판관이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이심(항고)은 애비가 맡는다. 여기서도 결말이 안 나면 내가 대법관이 돼서 상고심을 맡는다.

오늘은 다행히 애비의 엄중한 꾸짖음과 얼차려 벌 받기로 원만히 끝나서 나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 올 때는 둘째 놈이 제 아버지의 벌을 피해 내게 와서 “할아버지가 최고 어른이니까 말려주세요” 하며 애교를 떤다. 그리고 잠시 있다 보면 동생이 “형아 이거 먹어봐” 하며 어제 숨겨놨던 과자를 첫째에게 준다. “뭐야 이게?” 하며 형은 받아먹으며 해해댄다. 싸우고 지지 볶던 일이 언제였냐는 듯이 논다. 이것이 커가는 애들인가 보다.

이렇게 해서 올 추석명절도 지나갔다. 이제 여섯 달만 지나면 내년 설이다. 그때는 얘들이 또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을까? 명절은 귀찮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조상과 후손들을 연결하는 맺음의 날로 여기고 지속적으로 잘 지켜나갔으면 한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