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이 글을 쓰는 2018년 8월 24일 오전 이 순간도 지나면 과거다. 과거는 역사다. 이 시간 전에 분명히 있었던 사실들이다. 다만 이를 알지 못 할 뿐이다. 이 시간 후의 일들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한 개인의 일상이든 사회 또는 공공기관 주변의 상황이든 간에 직접적으로 접해보지 않았을 뿐이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고 이것이 곧 역사라 하겠다.

필자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희박하다. 전문적으로 공부한 바도 없다. 다만 현실을 직시하고 경험을 해봤고 실제로 겪어봤기에 안다. 홍천 인성교육의 정신적 구 교육기관인 향교 주변만 봐도 알 수 있다. 향교에서 정문 동쪽엔 멋진 전통 한식 건물 교육관인 “충효관”이 있다. 2016년 신축된 이 회관이 있던 터만 하더라도 그렇다.

충효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낡은 기와집 너 댓 채와 슬레이트 지붕 건물의 서민주택들이 옹기종기 있었다. 대지는 원래 향교 땅이고 건물은 개인소유여서 철거 때 상당한 보상을 주고 이주를 시켰다. 헌데 이 건물이 있기 이전에는 초가집들이 열채가 넘게 있었다. 즉 1953년 6.25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날 무렵 피난 갔다 온 사람 원주민 등등이 모여서 임시로 집을 지었다.

나무를 불법(도벌)으로 베어다가 초가집으로 지었다가 1960년대 새마을사업 중 지붕개량으로 기와 내지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고 내부는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그곳에 필자의 지인(김천수 미국 이민)이 살고 있어 자주 갔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가집 기와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번듯한 개량 한식 건물이 들어섰으니 지금 와보는 사람들은 전혀 과거의 상황을 모를 것이다. 이것이 역사 이야기다.

한편 개신교회 중 홍천읍에서 굉장히 큰 편에 들어가는 희망교회 터다. 이곳은 1953년 여름 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에 민간병원으로 제이드병원(미국 음악선교사 마두원이 세움)이 있었고 그곳 빈 공간에 교회를 차리고 예배를 봤다. 당시 필자는 중학교 1년생으로 친구들과 같이 자주 갔다.

그 후 제이드병원이 두촌면 자은리로 이주하고 중학교 동기(박윤근 78)의 누나가 현 교회 터에 흙벽돌로 희망교회를 지었다. 당시 필자도 친구와 같이 벽돌을 나르며 땀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그 교회는 없어지고 박태선 장로교회라고 해서(전통 기독교회에서는 이단이라 하였음) 교회를 다시 짓고 수년 동안 있다가 경기도 덕소와 부천에 있던 본부 신앙촌이 몰락하고 교주는 사기 등으로 수감 후 사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희망장로교회(현 건물의 전신)가 지어지고(당시 이 교회가 현 등기소 앞 장로교회) 다시 현재의 웅장한 희망교회가 들어섰다.

신앙촌 건물터 옆에 돼지우리(농장이라고 하긴 너무 소규모)가 있었고 그 밑에 역시 필자의 동창이자 지인인 윤재희(79)가 살았고 그 지인의 부친은 홍천에서 최초로 인쇄소를 경영했다. 그 후 일시적으로 포도농장을 경영하다가 다 처분하고 그 터 일부에 다가구주택인 빌라를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요즘 홍천의 화제 중 하나가 홍천읍 신장대리 소재 서울약국이 홍천신협에 거금 22억여 원(평당 3600여만 원)에 매각됐다. 대지 60여 평인 이 건물에는 홍천신협이 이주해 본점 건물로 사용할 것으로 요즘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이 서울약국 건물은 50여 년이 넘은 건물이고 6.25직후 최초 목조2층 건물이었다가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4층 건물을 지었으며 약국이 있기 전 아이스크림(아이스께끼라고 했음) 공장이 들어섰었다.

오늘 이후 먼 훗날 사람들이 이곳 신협 점포 앞에서 “이곳이 과거에 서울약국 자리이며 홍천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였다”고 말들 할 게다. 이처럼 간단한 얘기지만 홍천을 아끼는 마음에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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