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코미디언이 저 혼자 웃으면서 청중에게 웃음을 강요할 때, 가수나 사회자가 공연이 끝나면서 재미있느냐고 물을 때, 무대에서 젊은 가수가 노래하는데 뒤에서 반라의 몸으로 춤추는 나이 많은 무용수나 백 코러스를 볼 때 나는 측은함과 계면쩍음을 느낀다. 직접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영상물의 화면을 보고 박수를 강요하는 주최 측의 사회자와 그에 호응하는 관중을 볼 때, 개그맨들이 저 혼자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색한 행동으로 관객(청중)을 웃기려고 하나 방청객이 전혀 웃지 않을 때 그들의 표정을 보면 내가 겸연쩍다.

국회 청문회장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청문대에 오른 증인이 모르쇠로 부정만 하다가 자기에게 유리한 질문엔 응답을 하고 불리한 질문에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선 다시 유리한 기억만을 증언할 때 그의 표정을 보면 측은하다. 토론회(특히 정치인의 토론)에서 여·야 당이 뒤바뀐 상황에서 과거의 주장을 뒤바뀌어 번복할 때 그들의 표정 또한 겸연쩍기 짝이 없다.

축구경기에서 선수가 결정적인 슛을 헛발질할 때, 신도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설교하는 목회자를 볼 때, 신도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경을 열심히 독경하는 스님의 뒷모습을 볼 때, 음식점에 손님은 없고 주방이나 카운터의 직원이 스마트폰만 보고 앉아있을 때, 가수가 노래를 끝내고 박수를 쳐달라며 애원할 때 그들의 표정에서 겸연쩍음을 본다.

피아노 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때 그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보조자의 얼굴을 볼 때 또한 겸연쩍어 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보다 예쁜 신부의 친구(들러리)들이 많을 때 신부의 표정이 겸연쩍어 보인다. 친한 동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식대를 낼 때 서로 눈치만 보다가 형편이 덜 좋은 친구가 식대를 낼 때 부자친구의 일그러지는 듯한 묘한 표정을 볼 때도 겸연쩍고 측은하게 보인다.

어떤 모임에서 지인이나 선후배가 분담금을 낼 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자가 요리조리 따지면서 저는 한 푼도 내지 않을 때, 살기가 곤궁해 보이고 또한 사실이 그러한데 후한 기부금을 내고 언론이나 홍보에 그 사실이 기사화돼 보도되는 모습을 볼 때도 나는 또한 계면쩍고 측은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그러한 좋은 일을 많이 못해서 그럴까?

부자들이 더 많은 재물을 모으려고 아등바등 댈 때, 한국의 대재벌들이 골목상권 다 점령하고 그도 부족해 3~4세들을 앞세워 갑질을 할 때 측은하고 계면쩍음을 느낀다. 학교는 중고등학교도 안 나왔는데(학벌을 논하고자 함은 아님) 대학원(행정) 나왔다며 명함에 새기고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을 볼 때, 어떤 사안에 대한 얘기를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우기다가 제 말이 틀렸음을 알 때 그 자의 얼굴 표정 또한 계면쩍어 보인다.

10여 년 전 미국 소 광우병 오보가 한창일 때 그 오보대로 행동하며 그렇지 않던 사람들을 우습게보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미국산 쇠고기가 괜찮다니까 그 고기 잘 먹으면서 그 때의 행동을 지금의 표정에서 읽을 때 겸연쩍고 측은하게 보인다. 자기의 자녀가 제 반에서 1등 한다고 자랑하다가 전교에서 1등 했다는 학생의 부모를 대할 때의 표정 또한 그렇다.

필자는 음치다. 그래서 노래를 못한다. 그런데 여행 때 관광버스에서 돌아가며 노래를 할 때가 있다(지금은 안 그러지만). 또 회식이 끝난 후에 노래방 같은 곳에서도 못하는 노래를 억지로 시켜놓고 내 모습을 보는 그 지인들 또한 겸연쩍고 측은하게 보았을 것이다. 반주와 맞지 않는 어설픈 내 노래에 내 자신이 쑥스러우니 남들이야 어떠했겠는가.

세상에는 주관적이나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주변에 측은하고 겸연쩍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자주 보게 되어 마음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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