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금년이 서른일곱 번째 맞는 스승의 날이다.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스승은 임금님, 부모님과 같이 존경받았다. 심지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 먼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학생들의 인권이 강조되면서 선생님들의 학생지도가 녹녹치 않게 되었다.

교실 붕괴니 교권 추락이니 할 때 국가차원에서 스승존경 풍토를 만든다며 거창하게 행사를 치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금지법이 적용되면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조차 금지된 상태에서 학교마다 스승의 날 행사실시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어떤 학교는 아예 휴업일로 운영하는 학교도 있다.

과거 산업사회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지식을 습득하는 곳은 오직 학교였다. 하지만 지식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매체와 공간이 쏟아져 나왔다. 학부모들의 학력수준도 향상됐다. 선생님들 스스로도 사명감보다는 직업인으로서 권위를 내려놓으면서 더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게 됐다.

예전에는 교육 목적을 위해 사랑의 매라는 체벌이 허용됐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형태라도 학생들에게 신체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행위 모두를 아동학대라고 본다. 학생의 인권은 존중받는 반면 선생님들의 교권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가고 있어 선생님들의 학생지도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시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말 그대로 변화는 빛의 속도인 광속도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을 양성하는 체제와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의 교육과정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한때 유행했던 말 중에 ‘19세기의 시설에서 20세기의 교사가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었다. 시설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교사의 질 향상에는 의문점이 많다.

세태의 변화는 선생님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주도한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은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자기연찬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러나 변화를 선도하기는커녕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선생님들의 자화상이다. 선생님들이 변해야 학생들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다.

여하튼 선생님들은 미래사회의 주역이 될 내일의 주인공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고를 떠나 선생님을 존중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학생을 둔 학부모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필요하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고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되거나 바른 인성 함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과거에는 잘 모르는 사람을 호칭할 때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저속하다고 여겨졌는지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요즘엔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직업이 무엇이든 나이가 어찌되었든 처음 보는 사람이면 모두 선생님으로 통한다. 학생들 앞에서 지식을 전달하거나 인성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두 선생님이 된 것이다.

가르치는데 호칭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앞집 아저씨도 선생님이고 학교에 와서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도 선생님이라면 더 이상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경심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을 교수라고 부른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교사라고 부른다. 교수와 교사의 차이는 한자어의 차이일 뿐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학교 선생님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개인과외, 학원 등에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어야 한다. 호칭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된 호칭 하나 갖춰주지 못하는 국가라면 문제다. 가르치는 사람이 신바람이 나야 학생들에게 열정을 발휘해 지도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풍요의 기틀을 교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여부를 떠나 교육의 중요성은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선생님들은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연찬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국가 사회적으로 선생님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생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이영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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