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1960년은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이다.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가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 여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었고 야당은 조병옥과 신익희가 당수로 있던 민주당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진보당을 위시해 군소정당이 많았으나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우리나라 전체가 그랬듯이 홍천도 예외 없이 집권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여당인 자유당에는 국회 부의장인 이재학 3선의원이 있었고 야당은 민주당으로 김대수(화촌면 송정리 거주) 씨와 성낙신 단장이 있었다.

이재학 부의장은 여당 온건파로 이기붕과 쌍두마차였다. 이 부의장은 온화한 인품에 차분한 선비형 정치인이었고 성낙신 씨는 용장형 인품으로 근육형 체격에 눈썹이 진하고 쉰 목소리로 돌격형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은 대조적인 성품의 정치가다.

이재학 부의장은 3선의원에 4선은 옥중당선까지 됐으나 등원하지 못하고 낚시와 애연가로 유명했으며 미술과 문학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맏아들인 이교선 국회의원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둘째아들인 이응선 씨는 홍천에서 2선의 국회의원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이재학 부의장의 후광이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홍천으로서는 훌륭한 정치가문의 집안이다.

성낙신 단장은 목재업을 하면서 국회의원에 4번의 도전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년은 서울에서 보냈다. 수년전 작고 후 홍천군 남면 유목정리에 유택을 정했다. 그의 가족은 4남 1녀로 모두 대학을 나온 후 제재업 건축 등으로 장남인 성진경 씨는 많은 재력을 모았고 둘째는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에 살고 있으며 셋째인 한경 씨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사업을 하다 귀국했으며 넷째 웅경 씨는 국내 대기업인 종근당 제약회사에 있었고 막내 외동딸 춘경(애경)씨는 고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있다가 지금은 전업주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 쪽에 한번쯤 도전을 해볼 만한 집안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아르바이트는 신문배달이 유일했다. 필자가 3년간 알바를 한 동아일보 지국장 박춘식(미국 거주) 씨는 축구심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사냥도 했다. 키가 작달막하고 스포츠맨으로서 활발한 활동으로 지역 언론을 주도했다.

조선일보 지국장 이인수(작고) 씨는 평소 국민복 차림의 월남한 피난민으로 홍천에서 자리를 잡고 지역 어른으로 활동했으며 필자의 지인 두 명이 알바를 했는데 고교 졸업 후 대학등록금을 쾌히 대주기도 했다. 경향신문 지국장인 장원준(작고) 씨는 당시 야당을 이끄는 골수 민주당원으로 김대중과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과도 매우 가까워 그분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국제방송국 임원까지 했다. 당시 강원일보와 서울신문 지국장을 한 안준근(작고) 씨는 여당의 핵심인물이자 지역 정치인으로 토호세력의 한 축이었다. 그는 4.19의거 때 가옥이 피해를 볼 정도로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밖에 초대 면의원으로 고일혁 씨가 있었고 초대 축협조합장으로는 용환열 씨가 있었다. 명동보육원을 운영하면서 역시 동면 면의원이던 허만훈 씨는 후에 강원도의회 의장까지 했다. 홍천읍 면의원이었던 이종춘 씨도 도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이광호(88세) 씨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육상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장우(87세) 씨는 동경아시아경기대회 역도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현재는 인천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홍천군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었다.

당시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필자와 지인들은 60여 년 동안을 한 지역에서만 살았고 또는 외지에 나가 있다가 그곳에서 퇴직을 하고 귀향해서 이제는 인생의 후반기를 장식하고 있다. 자연은 무한한데 인생은 유한한 섭리 속에 지는 석양이 더 붉듯이 생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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