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2-79]

모기 녀석이야 앙칼지게 물든 말든 여름이면 시원한 누각에서 낮잠 한숨을 하기에 딱 좋다. 암벽에 정자를 짓기도 하고, 번지르르하게 암자를 짓기도 한다. 신선이 따로 있을 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곳에서 임과 함께 단잠을 자고 나면 천하를 얻은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빈 벽 절반 쫌 가을달이 밝게 비추고 있는데, 그대와 서로 다정하게 베개 베고 포근히 잠이 들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樓巖(누암) / 백담 구봉령
빈 벽에 절벽에는 가을달이 비추고
그대와 서로는 베개 베고 잠들었지
달밤에 꿈을 꾸는데 안개 자욱 둘러싸네.
秋月半虛壁 與君相枕眠
추월반허벽 여군상침면
明宵兩地夢 同繞一江煙
명소량지몽 동요일강연

온 강을 안개가 자욱하게 둘러싸고 있다네(樓巖)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1526∼1586)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빈 벽 절반 쯤 가을달이 밝게 비추고 있는데 / 그대와 서로 다정하게 베개 베고 포근히 잠이 들었네 // 달 밝은 밤에 두 곳을 다니며 꿈을 꾸었는데 / 온 강을 안개가 자욱하게 둘러싸고 있었다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바위 위의 누대에서]로 번역된다. 고양이란 녀석이 난간 누대 같은 곳에 올라가서 앉아 있는 꼴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버티면서 낮잠을 즐기는지도 알 수 없다. 바위가 뾰쪽하고 사방이 훤히 트인 절경인 곳에 누대(樓臺)가 있어 신선이 낮잠을 즐기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곳에 더러 암자가 있는 경우가 있다.

시인은 아마 이런 곳에 가서 시적인 상상을 했든지 시상의 그림을 넉넉하게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빈 벽 절반쯤이, 가을 달에 밝게 비추고 있는데, 그대와 서로 베개 베고 포근히 잠이 들었다는 시상을 이끌어 냈다. 신선이 살고 있는 절경이었겠다. 그곳에 오르면 초탈의 세계를 맛볼 수 있고, 진세(塵世)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초연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더 밝고 더 희망찬 단꿈을 꾸면서 상상의 날개를 달고 너른 초탈의 세계라는 꿈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달 밝은 밤에 두 곳을 다니며 꿈을 꾸었는데 온 강을 안개가 자욱하게 둘러싸고 있었다는 인간세계를 벗어나는 그것에 안착하면서 기분을 만끽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가을달이 밝게 비춰 포근하게 잠들었네, 두 곳 다녀 꿈꿨는데 안개 자욱 둘러싸고’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1526~1586)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 예문관검열, 봉교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이르렀다. 1564년 문신정시에 장원하였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秋月: 가을 달. 가을달이 비추다. 半: 절반. 虛壁: 빈 벽. 속이 텅빈 벽면. 與君: 그대와 함께. 相枕眠: (그대와) 서로 베개 베고 잠들다. // 明宵: 달 밝은 밤. 兩地夢: 두 곳에서 꿈을 꾸다. 同繞: 함께 둘러싸다. 一江: 한 강. 혹은 온 강. 煙: (사방이) 연기가 자욱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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