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사람들은 꿈이 다양하다. 꿈이 없다면 살아갈 희망도 없다. 그런데 과연 그 꿈이 이뤄졌는지 한번쯤 되살펴보자. 대개 어렸을 때의 꿈은 막연하다. 희망과 꿈이 뭔지도 모르면서 희망을 얘기한다. 유년시절 아니 그보다 더 어렸을 때의 꿈은 정말 재미있고 살펴볼만 하다.

필자의 꿈은 도장관(지금으로 치면 도지사나 장관)이었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이웃 어른들이 “넌 이담에 커서 뭣이 될래?”하면 서슴지 않고 “도장관이요” 했다고 한다. 도장관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지금은 고교 3년생이고 대학입학 준비가 한창인 외손자는 어려서 “넌 이담에 커서 뭐가 될래?”하고 물으면 “포크레인 운전자요” 했다. 그 후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경찰관이 돼서 백차를 몰겠다고 했고 초등학교 때는 과학자 중학교 때는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다. 지금 물으면 피식 웃기만 한다.

꿈은 직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직업은 현실이고 꿈은 이상이다. 희망과도 연계가 있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시골의 원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뭣을 할 건지 내 자신도 몰랐다. 다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독서량으로 문학(글쓰기)에 대한 동경만은 잃지 않았다.

1960년 초 고교를 졸업하고 또래들이 모여 문학동아리를 만들고 창립회원이 됐다. 이것이 홍천의 최초 순수 문학회의 창립이다. 맨 먼저 나온 동인지가 “이십대”이고 그 다음이 “층계” 마지막이 “문향”이다. 모두 몇 권씩 등사기로 밀어서 수제작 한 것이다. 가리방으로 필적 좋은 이정행(서울 거주)이 주로 썼다. 이 무렵 춘천사범학교(지금 춘천교대의 전신)를 나온 선후배 몇몇이 교단문학회(화양)를 창립해서 몇 년 동안 활동하다 중단됐다. 이 문학회는 각자가 다른 곳에 근무해서 순수 홍천문학회라고 하기엔 좀 어색한 부분도 있긴 하다.

그 후 1967년 필자가 농협은행에 입사하면서 문학 활동도 뜸해지다 자연스레 홍천문학모임이 중단되는 공백 기간이 있었다. 필자는 직장에서 직장문고에 투고하며 문학 활동은 잠정 중단됐고 직장에서 금융인문화제 문학부문 금상(심사위원 서정주 조병화 박재삼)을 수상했다. 당선작인 ‘한줌의 소금’은 책으로도 발간됐고 이후부터 기성 문인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 순수문학지 “한국시”와 “한맥문학”의 추천으로 재등단도 했다. 두 번째 시집 ‘산이 있기에’는 재판까지 발행됐으며 이 시는 화천읍 낭천등산로 입구(화천청소년수련원 뒤)에 시비로 세워졌다. 물론 화천군에서 세워준 것이다.

직장생활 30여년 무사히 퇴직했고 애들(1남2녀)도 다 자라서 좋은 직업을 갖고 잘 살고 있다. 그렇다면 필자의 꿈은 이뤄졌는가? 성공한 건가? 필자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인간에게서 욕망을 빼고 나면 시체란 말이 있다. 다만 그 욕망이 과욕이나 오욕이 돼서는 안 된다. 범인들에게 만족이란 영원히 존재하기 힘들다. 성인이나 종교계에나 있을 법한 얘기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다. 세계를 지배했던 영웅들은 그들의 끝없는 욕망(꿈)을 쫓다가 결국에 패망하고 만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욕망이 없으면 발전도 없는 게 현실이다.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 할지라도 그 꿈을 쫓아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수도 있고 꿈의 근처에서 머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꿈조차 꾸지 않으며 인생설계를 한다면 너무 허망한 내일을 맞을 우려가 있다.

새봄과 더불어 학생들은 이미 졸업을 했고 입학도 했다. 청소년들이야 배움의 길에서 크고 넓고 높은 꿈을 갖고 세상을 펼쳐나가겠지만 학교를 졸업한 인생 초년생들은 과거에 꿈꿨던 나의 앞길을 되짚어보고 차근차근 찾아가야 하고 기성세대의 성인들은 새로운 삶(生)을 찾아 또 다른 아름다운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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