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하와이 진주만이 기습적인 공격으로 많은 인명과 군인이 사망하고 항구는 폐허가 됐으며 미국은 작전훈련 나갔던 항공모함을 필두로 잔여 군장비로 반격에 나서서 제국주의 일본을 패망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진주만에는 피폭된 함정 근처 약 200m 거리의 일본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항복문서에 천왕이 직접 미 사령관 맥아더 장군과의 항복서명서에 서명한 장소로 쓰인 미주리함이 퇴역해서 보란 듯이 정박하고 있어 일본에 대해서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불과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떤가. 미국과 일본은 찰떡궁합 동맹이 돼서 태평양 방어에 손잡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도 찬 바닷속 해군장병들의 영혼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수장된 해군의 부모들은 자식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둔 이유로 “비록 우리의 자식이지만 또한 국가의 자식으로서 이 바닷속에 내 아들들이 있는 한 미국의 평화를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고 결의하고 수장을 하기로 했으며 지금도 당시 생존했던 해군이 사망하면 화장한 유골을 바다 속에 수장을 한다고 한다. 바다는 고요했으나 그날의 참상을 이야기나 하듯이 기름띠가 역력히 몇 년 동안 떠오르고 있다.

약 2시간 동안의 진주만 관광은 아픈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특히 1인용 어뢰(길이 15m 둘레 2m)에 일본 해군의 자살폭탄으로 미군의 함정 피해가 컸으며 비행기(가미가제)의 자살폭격기는 들었지만 어뢰 가미가제는 처음 듣고 보는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일본인의 잔인성을 다시 한 번 느꼈고 이 지구상에서 제국주의는 영원한 승리는 없고 결국은 멸망하고야 만다는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했다.

하와이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캡션’으로 1778년에 발견하고 1820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왕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 부족들이 왕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1886년경 미국에 점령당해 미국 영토가 된 후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州)가 됐다. 하와이가 우리나라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제국 즉 구한말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후 경제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고종 때) 많은 조선인들이 일자리를 구해 만주(연해주) 등으로 갔다.

하와이는 1903년 최초로 86명이 인천항을 떠나 한 많은 하와이 인력이민으로 갔고 다시 1905년 2차로 8000여 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노동자로 갔다. 그때 이민1세대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간난 할머니도 106세를 일기로 작고했고 그 후손들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이민자들이 고국에서 갖고 온 종자 중에 아주까리(기름 짜는 약용식물)가 지금도 빅아일랜드 섬에 많이 자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1911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이곳에 정착해서 선교(그리스도교)로 나라를 일으키자고 서재필 박사와 함께 교민 교육에 앞장섰다고 한다. 교민 1세대들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값싼 노임에 착취당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필자의 작은 조부께서 1920년경에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신다며 떠났는데 떠날 때 우리 진주강씨 박사공파 통정공 할아버지의 족보 한질을 갖고 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족보가 있어야 행세를 한다고 했다. 그 후 조부님은 만주에서 다시 하와이로 갔다는 집안 어르신의 말씀이 있었을 뿐 후의 행적은 묘연했다. 아마도 유추컨대 작은 조부는 하와이에서 다른 이민자들과 같이 상생하다가 생애를 끝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번 여행에서 한인 이민자 생활사가 고스란히 있는 박물관을 관람하지 못한 것이 필자 개인으로서는 여간 아쉽고 서운한 게 아니다. 여행은 갈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많이 가는 게 좋다. 여행을 하는 것만큼 보람과 경험과 생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해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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