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150】

행여나 하면서 가슴 조이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외 지사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이 위기에 놓여있을 때 한 편의 시문을 남기고 절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감행하고 급기야는 한일합방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몸을 바쳤다. 여기에서는 절명시 한 편을 남기고 몸을 바쳤던 시인을 만나면서 절구로 된 4수를 읊었던 그 넷째 수를 번안해 본다.

絶命詩(절명시)[4] / 매천 황현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고
仁만을 이루었을 뿐 진정 忠이 아닌데도
윤곡(尹穀)을 따른 것일 뿐 진동을 밟지 못하네.
曾無支厦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증무지하반연공 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殺 當時愧不섭陳東
지경근능추윤살 당시괴불섭진동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누나(絶命詩)로 제목을 붙여본 절구 4수 네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으로 광양 출생인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다.

[절명시]는 경술국치의 설음을 보는 8월 7일(음력) 집에서 담근 ‘더덕술’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자결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었네 //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라는 시상이다.

지사는 절명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사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였다.

시인에게 남아있는 건 단지 절명의 한숨이 깊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1910년 8월 29일을 우리는 경술국치의 일로 기억한다. 시인은 이 소식을 접한 후에 바로 절명을 단행한 것이다.

첫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이 되었구나 /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었는데 // 오늘날엔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는구나]로 라고 했다. 화자의 절망은 이제 절명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겠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국(憂國)의식의 질 높은 수준을 시로 승화시키는 탁월함을 보게 된다.

【한자와 어구】
支厦: 나라를 지탱하다. 椽: 서까래. 是成仁不是忠: 인을 이루고 충을 이루지 않는다. 尹殺: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 僅: 겨우. ?: 밟다. 愧: 부그러워하다. 陳東: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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