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129】

평생을 직장에서 일하다 퇴직하고 나면 허무한 자기 인생 역경을 되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하고 못 찾았던 친지도 찾아뵙는다. 막걸리 한 잔 거나하게 나누다 보면 온 세상이 내 것이다 싶게 흥에 겨워한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으면 게으름을 피우면서 아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그런 시간들이 더러 있다. 동중정(動中靜)의 경지라고나 할까. 할 일없이 꽃구경하며 한적한 하루를 보내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幇甚(방심) / 쌍매당 이첨
평생에 뜻하던 일 다 이루기 틀렸고
어쩌랴, 이제는 게으름만 부쩍 느니
낮잠 깨 아이 손잡고 갓 핀 연꽃 구경하네.
平生志願已蹉? 爭奈衰慂十倍多
평생지원이차타 쟁내쇠용십배다
午枕覺來花影轉 暫携稚子看新荷
오침각래화영전 잠휴치자간신하

아이의 손잡고 갓 핀 연꽃 구경하네(幇甚)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1345∼ 1405)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65년 ‘감시’에 합격한 뒤 13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이 되었다. 1403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종이를 의인화한 [동문선(東文選)]에 시문 130여 편이 전한다. 저서로 [쌍매당집]이 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평생에 뜻하던 일 이미 틀렸고 / 어쩌랴 게으름만 부쩍 느는 걸 // 낮잠에서 깨보니 꽃그늘로 옮겨가서 / 아이의 손잡고 갓 핀 연꽃 구경하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게으름뱅이]로 번역된다. 고향 집에 소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벼슬에 전념하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보니 심었던 소나무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나무가 없어진 자리에 없었던 매화나무 2그루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호(號)를 ‘쌍매당’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쌍매당은 그만큼 하나의 사물을 보는 시야가 넓었다.

시인의 삶의 역경이 그렇듯이 시에서 보이는 흐름도 진취적인 면은 숨어들고 게으르고 포기한 듯한 시의 흐름이다. 자신의 게으름을 스스럼없이 비판한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평생 뜻했던 청운의 꿈은 접은 지 오래됐으니, 어찌하랴 부쩍 느는 게으름이라고 탄식한다.
화자는 게으름에 지친 나머지 낮잠에서 깨어보니 꽃그늘로 옮겨가 어린 아이 손을 붙잡고 이제 갓 핀 꽃을 구경한다는 느긋한 성격까지 보인다. 아니다.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한 재충전으로 멋진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만난다.

【한자와 어구】
平生: 평생. 志願: 뜻하던 일. 已蹉?: 이미 틀리다. 爭: 다투다. 奈: 어찌하랴. 衰慂: 게으름을 권하다. 十倍多: 열배나 많아졌다. // 午枕: 낮잠. 覺: 깨다. 來~轉: ~이 와서 옮기다. 花影: 꽃그늘. 暫: 잠시. 携稚子: 아이의 손을 잡다. 看新荷: 새롭게 핀 연꽃을 구경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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