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127】

시조를 한시로 옮긴 작품이 900여수 전한다. 태종의 [何如歌]와 정몽주의 [丹心歌]가 그렇고 한시를 시조로 많이들 번안했다. 가람 이병기는 임억령의 [示子芳] 한시를 시조로 옮기며 제목을 ‘示友人’이라 바꾸었다. ‘자방’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가 바꾼 시조 원안은 다음과 같다. [절 앞에 진 꽃이 옷에 자주 부딪힌다 / 팔을 젓고 돌라올제 맑은 향기 떠돌으며 / 저 산의 수없는 벌이 멀리 나를 따르더라.(1925, 7, 8:동아일보)] 이를 재 번안해 본다.

示子芳(시자방) / 석천 임억령
오래된 절 앞에서 봄날을 바라보니
꽃잎은 비에 날려 무수히 옷에 앉네
소매에 묻은 향기 찾아 산벌들만 날아들고.
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고사문전우송춘 잔화수우점의빈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蜂遠진人
귀래만수청향재 무수산봉원진인

수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아 날아드네(示子芳)로 제목을 붙어본 칠언절구다. 작자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이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우형(遇亨)의 아들이며 박상(朴祥)의 문인이기도 하다. 1516년 진사가 되었고, 1525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오래된 절 앞에서 봄날을 보내는데 / 꽃잎은 비에 날려 무수히도 옷에 앉네 // 집에 와도 소매 가득 향기가 일어나니 / 수 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아 날아드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벗 자방에게 봄을 보임]으로 번역된다. {示子芳}의 셋째수를 잘랐다. 봄이 떠나는 옛 절 문에서 시인은 봄비에 젖어 숲을 걷는다. 비는 내리고 걷는 옷깃 위로 자꾸 묻어나는 꽃잎. 이러한 겹쳐진 장면 속에 봄을 보내는 울적한 심사는 없다. 꽃잎이 묻은 소매이니 맑은 향기가 가득하고, 벌은 꽃으로 오인하여 잉잉거리며 쫓아온다는 시심도 일으킨다.
시인은 가는 봄에 져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한탄한다.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어 벌을 몰고 돌아오는 것이다.’ 시인은 오래된 절 앞에서 또 봄을 보낸다. [또]에는 ‘헛되이’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시들은 꽃에는 오래 묵힌 냄새가 물씬 난다.
화자의 옷에 떨어져 소매 가득 옛 절의 향기가 스며든다. 그 냄새와 함께 별들이 화자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분명 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향기 그윽한 봄을 제목에서는 ‘자방’이란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은 분명하겠다.

【한자와 어구】
古寺: 오래된 절. 옛절. 門前: 문 앞. 又送春: 또 봄이 오다. 殘花: 꽃잎이 떨어지다. 隨雨點: 점점히 비를 따라서. 衣頻: 자주 옷에 앉다. // 歸來: (집에)돌아오다. 滿袖: 소매 가득히. 淸香在: 푸른 향이 남이 있다. 無數: 수많은. 헤아릴 수 없다. 山蜂: 산벌. 遠人: 멀리서 좆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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