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114】

민족적 큰 스승을 만난다. 말로 하는 조국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 조국이다. 조국을 잃었을 때 학문적, 종교적, 문학적이 아니라 몸으로 승화했던 시인이다. 그가 애타게 부르짖은 임은 바로 조국이었다. 자유시 [임의 침묵]에서나 정형시 [추회(秋懷)] 등에서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서회에서 또 다른 무엇은 전혀 찾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한시 중에서 애국지심(愛國之心)이 넘쳐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秋懷(추회) / 만해 한용운
보국하다 빈 칼집 옥중 신세 지겨운데
이겼다는 기별 없고 풀벌레만 우는구나
또 다시 부는 가을바람에 백발신세 늘어가고.
十年報國劒全空 只許一身在獄中
십년보국검전공 지허일신재옥중
捷使不來虫語急 數莖白髮又秋風
첩사불래충어급 수경백발우추풍

가을날의 심회(秋懷)로 번역되는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홍성출신으로 본명은 한정옥이다.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 승려인 그는 민족독립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일제 때 출간된 시집《임의 침묵(沈默)》으로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누누이 역설했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던 애국지사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십년 세월 보국하다 칼집은 완전히 비고 / 한 몸 다만 옥중에 있는 것으로 허용 되었네 / 이겼다는 기별 아직도 오지 않았건만 벌레는 울어대고 / 또 다시 부는 가을바람에 늘어나는 백발이어라]라는 시상이다.

위 시 제목은 [가을날의 심회]로 번역된다. 글쓴이의 대표작 「임의 침묵」은 이별을 통해 만남을 이루는 소멸과 생성의 변증법적 원리가 바탕이다. 세속적 사랑의 종교적 승화에 대한 이념적 동경을 노래한다. 이별이란 소멸의 변증법 설정은 존재의 무화적(無化的) 충격을 통해 재생과 생성을 이룩하려는 ‘무의 통과과정’이겠다.

시인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원리를 지니게 되어 자율적인 소멸은 자율적인 생성으로 회귀하게 된다는 이별의 변증법적 원리가 내포된다고 그의 시문에서 강조한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기에 가을을 감회하는 시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옥중의 서회를 읊는다. 옥중에서 ‘우리가 이겼다’는 기별 없는 풀벌레만 울어대는데 가을바람에 백발이 늘어난다고 했을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친 큰 스승의 가르침 앞에 그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한자와 어구】
十年: 십년. 報國: 보국하다. 劒全空: 칼집이 완전히 비다. 只: 다만. 許: 허용하다. 一身: 한 몸. 在獄中: 옥중에 있다. // 捷使: 싸움에 이겼다는 기별. 不來: 오지 않는다. 虫語急: 벌레만 울어댄다. 승전의 아무런 기별이 없다. 數莖: 몇 줄기. 白髮: 백발. 又: 또 다시. 秋風: 가을 바람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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