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달아 태풍이 몰려온다고 한다. 하나는 자동 소진되었고, 또 하나는 돌아오는 토요일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한다. 비가 하도 거칠게 와서 좀 무서웠다. 냇가에 물이 불어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논들마다 물이 넘치게 차올랐다. 논에 들어 찬 물을 보니, 어릴 적 비만 오면 아궁이 가득 물이 들어차다, 부엌 안 전체가 목욕탕 욕조처럼 가득 찼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부엌의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솥을 떼어 내 큰 돌 두 개를 괴어 밥을 끓이셨다 한다. 세월이 훨씬 지나 석유를 넣어 음식을 끓일 수 있는 “곤로”가 나왔다. 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에, 한달음에 달려 와 오빠랑 곤로에 시래기국을 덥혀서 이불 속에 묻어 논 밥을 말아 먹곤 했다. 시래기 국밥에 신 배추김치를 넣어서 먹는 그 맛이 아직도 혀 끝에 삼삼하다. 우리는 자그마치 6남매나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정말 바빴다. 금세 자라는 머리를 감당하지 못하셔서 뒤통수 부분은 밤톨처럼 도려내고, 앞머리는 머리카락 나기 시작한 곳까지 잘라 주셨다. 외모나 미학이 크게 중요치 않던 시절이었다.

긴 장마 때였던 거 같다. 콘크리트가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는 유난히 작은 길웅덩이가 많았다. 버스라도 지나가는 날이면 옷으로 날아들던 그 흙탕물!!

물고기를 잡아다 팔거나, 집에서 돼지 같은 가축을 길러, 돈을 만들지 못하는 집안들은 대부분 무척 가난했다. 특히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신 탓으로 돈 쓰는 것에 공포감을 느끼실 정도였다. 동네에 환한 전기가 들어오고, 이어서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전화 교환수가 연결해 주는 전화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든 문명의 혜택이 우리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적으로 부잣집 딸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논 한 뙤기 밭 한 뙤기 없이 시작한 살림이 도무지 필 기미가 없어 스스로 절망하셨다.

최불암씨 주연의 “수사반장”은 왜 이렇게 재미있었는지, 그로인해 한 집 두 집 텔레비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전기가 들어오고도 2년이나 더 지난 후에 텔레비전을 샀으니 그동안 오빠랑 나랑 동생이 이집 저집 텔레비전 동냥을 다니면서 얼마나 설움을 삼켰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오빠는 매일 밤 우리 셋의 머리를 모아놓고 작전을 폈다. 그날 밤, 지친 비가 내렸다. 길은 오래 질척거렸고, 오빠는 ‘홀라당’ 그 중 텔레비전을 잘 보여주는 마음 넉넉한 집으로 사라졌다. 동생도 오빠가 지시해 준 어느 집으론가 내뺐다. 혼자 남은 나는 어머니가 큰 맘 먹고 사준 장화를 신고 터덜터덜 윗집 이모라 부르는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막 뜰방으로 올라섰는데 너무나 엄격하고 ‘여지가 없는’ 이모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아가야! 오늘은 안 된다잉. 내일 보러 와라. 니 발에서 흙 떨어징께 낼 오그라잉!”

일언반구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30촉 전구 홀로 켜고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몇 시간을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동네에 초상이 나서 떡이며 전을 얻어먹기 위해 상엿집으로 죄다 몰려갔다.

공교롭게도 이모가 누군가를 붙들고 어젯밤의 일을 큰소리로 말하며 킬킬대고 계셨다.

“아 그랬더니 숨도 안 쉬고 도로 가드랑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안 들키려고 눈에 보이는 쥐구멍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그렇게 검정 고무신 신고, 책보 띠고 내달리며 보냈던 내 유년의 여름 날!

장마가 시작되려는 무렵이면 그 아찔했던 가난마저 달달하다. 왜냐면 추억이 있으니까. 어머니 아버지 오빠 동생과 매운 모깃불 피워놓고 둘러 앉아 수박을 먹던 그 천진한 추억말이다.

조연재
서울 서초동 소재
조연재 국어 논술 교습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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