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전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민간기록원
요즈음 학교폭력이 도를 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반세기전(필자가 중·고교 재학 때)은 어땠는지 학교생활과 주변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온고지신이라고 했던가 옛것을 돌아보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일게다.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유엔에 의해서 휴전이 되고 전쟁직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빈국 중에 빈국이었다. 국민소득(백여 달러도 안됐다)을 따질 수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열만은 대단했다.

필자의 경우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천중학교에 시험을 치고 입학했다. 당시 홍천중학교는 지금의 홍천향교(당시 3동)에 기존건물과 판잣집, 미군이 쓰던 군용천막 등을 사용했다. 향교의 기존건물 명륜당은 교무실, 대성당은 교실, 동제는 교장실과 서무과였다. 당시의 중·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이고 중학교는 3개반 중 1,2반이 남자이고 3반이 여자반 이었다. 한 반의 학생은 60여명이고 점심을 싸오는 학생이 절반 정도였다. 물론 필자는 점심을 굶었다. 전쟁이 끝난 홍천시가지는 기와집이 대여섯 채였고 나머지는 판자집 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고 어머니는 제자라고 해서 새벽 부식상을 하셨다.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렸다. 다만 전문기술자와 도매상점주,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런대로 살기가 원만했다.

그렇다면 필자의 학교생활은 어떠했는가? 중1.2학년은 부모가 입학금과 학비(월사금)를 내주셔서 편안히 다녔고 3학년부터는 고학의 길로 들어갔다. 동아일보 일간지 신문배달이었다. 초창기 신문은 4면이고 공휴일에도 나왔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중앙지 8개가 발행됐고 동아일보의 경우 아침 속초행 버스로 오는데 홍천에는 7시경에 도착했다. 신문배달과 등교시간이 어중간해서 지각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신문뭉치 200부 정도를 옆에 끼고(가방은 친구에게 맡김) 한바탕 신나게 돌리고 나면 한겨울에도 이마에 땀이 송송 났다. 신문이 일찍 오는 날은 신문배달하고 등교시간을 맞출 수 있었으나 버스가 연착을 해서 8시나 9시경에 도착하면 신문을 반밖에 못 돌리고 학교로 간다. 오전수업을 하고 점심시간에 마저 돌린다. 어떤 때는 오후에 학교가 모두 끝난 뒤에 돌린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독자들이시다. 조간신문을 그 날 저녁에 받아보니 말이다. 당시 특히 생각나는 분이 지금 구인당한약방을 경영하는 엄경식 선배님의 부친이시다. 여름이면 늘 하얀 모시적삼에 조끼를 곁들인 한복정장을 하시고 신문이 배달되면 반갑게 받아주셨다. 또 한분은 궁도협회 도지부장과 새마을강원도지부장을 역임한 허만응 회장의 부친과 삼화제재소 정사장님, 성함도 상호도 생각 안나는 진리 미륵당 근처의 철물점(대장간) 주인, 우리집 이웃의 목수와 작은 목로주점을 경영하던 김동녀의 아버지 등이 학창시절에 잊지못할 분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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