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는 '속새울'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산골짜기의 고을이지만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속새울의 앞산을 '와우산(臥牛山)'이라고 불렀다.  '와우산'은 '속새울'과 '느릅나무정'에 걸쳐 누워있는 한 마리 소다. 배불리 속을 채우고 누워있는 소다.
  '노천'에 '비룡산'이 있다면 '속새울'에는 '와우산'이 있다. '원포동(원개울)'에 고선생이라 불리는 선비는 자신의 고택의 기둥에 신춘방을 붙여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와천년명속초 (牛臥千年名束草)
  용비십리향개운 (龍飛十里向開雲)
  명당자리를 두고 먹을 것이 넉넉함과 용이 구름을 열고 날아오르는 기상을 표현하고 있는 이 글은 영귀미(동면) 우체국 앞 원세동(94)씨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있는 시문이다.
  눈이 내린 날 아흔이 넘은 노옹과 마주앉아 깊은 세월 속에 묻어있는 기억을 더듬으며 차를 마시고 시문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속초'는 영귀미면의 면소재지이다. 주민자치센터가 있고, 보건소와  파출소가 있고 우체국과 농협이 있다. 또 75년이 넘는 속초초등학교가 있고 동화중학교가 있다. 한때는 양조장이 있어 술을 받으러 고개를 넘었던 시절도 있다.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 앞에는 오래된 비석이 하나 있다.  1906년에 세워진 홍천 현감 김영진의 선정비다. 이 비는 원래 '좌운'에 있었다. 당시에는 면소재지가 '좌운'이었는데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비바람에 씻겨 앞면의 글씨는 잘 알아볼 수 없으나 뒷면에 새긴 글씨는 또렷하다.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선정비 하나가 속초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삼재골' 어귀의 버덩을 '유정촌(楡亭村)'이라 한다. '와우산' 뒷버덩이 된다. 큰 느릅나무 아래 정자가 있었다하여 느릅나무정이라 하는데 정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큰 느릅나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원개울'로 넘던 골짜기와 '가래울'에서 이어지는 골짜기가 감싼 듯 품고 있어 아늑하다.
  '삼재골'로 들어가는 길에는 '아리랑고개'와 '목탁고개'가 있었다. 지금은 고개도 아니지만 예전에는 꽤나 구불구불하고 골이 깊었다. '목탁고개'는 골 안의 '불당골'과 연관이 있는 듯하고 상골을 캤다는 '상골'이 있고, '원개울'로 넘어다니던 '고사리골'이 이어진다. 
  '느릅나무정'을 굽돌아 내려오면 메밀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사락골'어귀의 민속음식점이다. 둔덕을 돌아 올라가면 '사락골'인데, 원래는 사락사(士樂寺)란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사락골'이다. '사락골'은 '꽃골'로 넘는 '큰고개'와 '고도리골' 그리고 토끼 닮은 바위가 있는 '토끼바위골', '산수골 빙애'로 넘어다니던 옛길이 눈 속에 묻혀있다. 
  '사락골'에서 개울을 건너 내려오면 '원개울'이다. '원개울'을 '원포'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원개울이 흘러나가는 내치기에 작은 포구가 있지 않았나 여겨진다.  
  '원개울'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원개울' 골짜기는 지금의 초등학교 뒤편의 골짜기이다. 골짜기는 그리 깊지 않으나 '원개울'이라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다. '소니골', '먹방골', '속새울'의 물은 원래 이쪽으로 흘러나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물길이 나면서 작은 개울이 남게 되었고 그 개울을 중심으로 '원개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개울은 보이지 않지만 시장 뒤편에는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있다. 비가림 초막도 지어져 언제든지 빨래를 할 수 있다. 이 빨래터가 원개울의 물줄기였다. 지금은 먹방골에서 내려오는 봇물이 샘통처럼 흘러내린다.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따듯한 샘물이 난다. 한 할머니가 빨래를 한다.
  속초초등학교와 동화중학교를 지나면 덕치 큰말로 이어지는 서낭당고개(동막고개)길과 덕고개로 길이 나온다. 나직나직한 양지바른 산 능선을 따라 제각기 자리하고 있고, '서낭당 고개'마루까지 가는골과 진골 등  골짜기들이 이어진다.
  '덕고개(독고개)' 아래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덕고개' 뒷산은 속초와 덕치 '비선뜰'의 경계가 되는 '마산(용마산)'이다.
  '덕고개(독고개)'는 바로 '마산'을 넘어 '소란'으로 이어지던 고개였는데, 지금은 발길이 끊겼지만 고개의 흔적은 남아있다. 고개 아래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길이 매우 불편하였다.  
  하지만 오룡터널이 개통되고 최근에 '등대(떼둔지)'에서 '서낭고개'를 넘어 수타사로 가는 길이 나면서부터는 길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영귀미' 시장을 지나 속초초등학교와 동화중학교 앞으로 돌아다니거나 농협 뒤 농로를 따라 돌아가야 했다.  
  '마산'의 끝자락 능선에는 인제, 홍천 김해허씨의 숭모각이 자리하고 있다. 숭모각에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존영과 허씨의 시조인 가락국 김수로왕 태후 '보주태주 허황옥왕비'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허씨 성의 시조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온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왕은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삼국유사 기이 편>

  별포나루터에 배를 대고 아유타의 공주를 맞아들인 김수로왕은 침전에서 황후의 이야기를 듣는다.   

  -저는 아유타국(阿踰?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삼국유사 기이 편>

  아유타의 공주 허황옥은 16세에 가락국의 왕후가 되어(한건무 24년 수로왕 7년: 48) 189년 3월까지 살았다. 그의 유언으로 ‘나의 성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하니 김수로왕은 둘째아들을 허씨로 사성(賜姓)하여 모성을 따르게 한다. 
  인제, 홍천에 김해허씨들이 낙향하게 된 것은 조선중종 때이다.  당쟁과 사화로 조정이 혼란한 시기에 계공랑 허희랑(希郞)은 인제에, 성균관생원 허희온(希溫)은 홍천 내촌면 답풍리로 내려와 은거를 하게 된다.
  '마산'은 옛날에 용마가 나왔다고 전해지며, 효동선생과 화담 서경덕 선생, 삼송당 백기선생이 세론을 강론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효동선생과 화담선생과는 친분이 깊었는데, 어느 날 화담선생이 효동선생을 찾아 왔다. 그러나 효동선생이 타계한지라 손수 그의 유택을 소점하였다고 하는데, 정승자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백세천손을 원하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백세천손자리를 원한다고 하자 좋은 자리를 버렸구나 하며 묘지를 유택하였다고 한다. 
  숭모각을 나와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러 '떼둔지'로 걸어 나왔다.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걷는다. 2010년 벽두에 내린 폭설에 이어 영하 20도까지 수은주를 끌어내렸던 날씨다.
  아주 오랜만에 겨울 추위다운 추위를 맞았다. 눈이 솔아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난다. 발이 시려온다. 
  '떼둔지'는 영귀미 우체국을 기준으로 면사무소, 농협, 동면교회 일대가 된다. 지금은 떼둔지라는 지명을 부르지도 않는다.
  '떼둔지'를 '등대(登臺)'라고 한다. 개울가에 등대를 이루었다는 것은 강물이 범람하여 퇴적층을 이루었고 이 둔덕에 떼가 무성하여 그리 부르게 된듯하다. 농협 앞에서 우회전하면 산수골로 -돌모루 -월운으로 이어지고 곧장 올라가면 노천으로 이어진다. 시장거리 어귀에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 와 소방서, 우체국이 이어진다. 한때는 동면양조장이 있었고, 병원도 있을 만큼 왕래가 빈번했던 시장거리를 벗어나면서 네거리가 나오는데 좌회전하면 '원개울' 속초초등학교가 나온다. 속초초등학교 리코더 중주단의 솜씨는 최소영(속초초교 월운분교 교사)선생의 지도로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동화중학교의 양궁부 선수들은 추운겨울에도 활시위를 당기며 동계훈련에 여념이 없다.
  시장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다리 건너는 '한갑실'이다.
  '갑실'이란 배들이 갑문을 지나거나 또는 배들이 들어가 있을 수 있게 만든 칸을 말하는데, 한갑실의 지명이 배와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갑실'에서 '사태고개'를 넘으면 '산수골 빙애' 어귀다.  
  '한갑실'에서 제방을 따라 내려오면 영귀미의 체육공원과 게이트볼장이 있고, '개운교'를 지나 다시 제방길을 따라 내려가면 '천령부리'가 나온다. '먹방천'과 '개운천'이 만나 '성전천(성수천)'을 이룬다. 합수를 이루기전 각각 보를 막아 '비선뜰'과 '자페뜰'로 물을 끌어들인다.
  '안시무개뜰'에서는 논바닥에서 골재채취가 한창이다. 이곳이 '월운천'과 '먹방천'의 물이 합수를 이루었던 곳으로 해마다 겨울이면 논바닥에서 골재를 파내고 있다. 다시 오룡터널에서 이어지는 다리 밑으로 빠져나와 여우고개로 이어지는 옛길로 들어섰다.
  '성전천'은 '성묵산' 아래 '재앞 뜰'과 '용마산' 아래 '비선들' 사이를 지나면서 이종호 시인의 시비와 민병태 민병숙 삼일 열사 묘소를 지난다.
  근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성수천이지만 '덕현마을(속초)'과 '성전마을(성수)' 사람들의 정을 돈독히 해주는 가교 역할도 했다.
  이 두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석전(石戰)을 벌였다. 석전은 강을 사이에 두고 돌을 던져 싸우는 놀이였다. 양편이 합의해서 시간을 정하고 정한 시간 안에 돌을 던져 싸움을 시작한다. 돌에 얻어맞아 부상당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녁에 할 때는 횃불을 피워 들고 하여 거화싸움이라고도 했는데, 지는 편에서는 강에 다리를 놓고 이긴 편에서는 술과 안주를 냈다.
  마을의 단합된 힘을 과시했던 석전놀이는 동학혁명 때는 영귀미면의 동학농민들의 무기가 되었으며, 일제침략기에는 항일 운동의 총알이 되기도 했다.
  영귀미로 들어오는 관문인 성수다리는 석전이 벌어지던 곳이었고 진편에서 섶다리를 놓았던 곳이기도 했다. 박무가 깔린 '자패'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자패의 수변공원에 세워진 이종호 시인의 시를 다시 읽으며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휘날리던 시인을 떠올려 보았다.
  '성묵골'로 이어지는 신작로 끝에는 영귀미 삼일 열사 추모비가 있고, 뒤 골짜기는 '성묵골'이다. 폐쇄된 석광산이 흉물스럽다.
  '성목골' 내치기 강가에는 '도깨비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보를 막았다.
  이곳부터 이어지는 '소구니강변'은 '성묵산'의 산그늘에 가려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보 아래에서는 피라미낚시와 다슬기를 줍는 피서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길은 '성목산' 중턱을 돌아가고, '성수천'은 노천 '공작산'에서 발원한 '덕치천'과 만나 몸집을 키운다. 길을 따라 '여우고개'로 돌아가다 보면 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고 어귀에 거석의 수타사 이정표가 있다.
  '덕치 소구니강변'으로 들어선다. 두 개울의 수량은 비슷하지만 '성수천'은 암물이라 하고 '덕치천'은 '숫물'이라고 한다. '성전천'을 건너는 다리는 '덕치교'이고 '덕치천을 건너는 다리는 '소구니교'이다.
  '소구니강변'은 암물과 숫물이 만나는 마을관리의 유원지이다. 특히 '덕치천'이 감고 도는 둔덕은 원래는 '사지기(사직골,사직동)'이다. 산과 강과 강가의 나무가 잘 어우러지는 사지기 뒷산 골짜기로는 '춤춘골'과 '사직이골'이 이어지고, '소군이골'은 여우고개에서 강을 건너 왼쪽으로 따라 이어진다. 
'소군이골'은 골이 깊고 막치미는 '우적산(소군이산) 샘골'로 이어진다. 그래서 수타사와 공작산의 산행 들머리가 되기도 한다.  '샘골'에서 와동 쪽으로 넘으면 와동 '수태골'이다.
  한여름에는 물이 실하게 흐르는 '소구니골'은 '소군이산'을 중심으로 내려오면서 '바른골', '닥밭골', '물부터진골' 등이 있고, '양태배기', '마장벌'을 지나면 '팥배나무골'과 '작은소구니골' 어귀가 된다. '작은소구니골'에서 능선을 넘으면 덕치 '귀미뜰'이고 '광골'과 '어쉬'의 '쐐기골'을 지나면 '소군이' 내치기다. 
  소구니 강변은 '여우고개보'가 생기면서 물이 깊어졌다. 이 보에서 '여우고개뜰'과 '굽두리뜰'로 물이 든다. '굽두리뜰'에서 '지루고개'를 넘어 '와동'으로 넘어 다녔다. '여우고개'는 덕치와 검율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대미산의 한 능선이 여우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하여 붙여졌다. 이 고개의 옛이름은 '성무재' 또는 '여의재'라고 한다. 여우고개마루는 홍천읍내를 굽어보는 남산 종주의 들머리이다.
  홍천읍지에는 '대미산성'과 '대미산'이 나오는데, '대미산성'은 '이괄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미산'에는 '봉화대'가 있었고 그 불빛은 '오음산'에서 받아 연락을 취했다. 여우고개마루에 '대미산성지' 표석과 성수리 방향에 '성목산성지' 표석이 세워져있다. 모두 같은 산성을 두고 다른 이름으로 표석을 세운 것이다.
  '대미산성'에는 '서문터'와 '망대터', '건물터' 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덕치사람들이나 성수리 사람들은 '성목산'을 '성묵산'이라고 부른다.
  '대미산'은 '야루정'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이다. 바위투성이의 산봉우리라 눈 내린 겨울풍경이 아름답다.
  '대미산'에는 이괄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이괄(李适)이 홍천에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왕조실록 인조 2년(1624) 2월25일 조(條)에 강원감사 윤안국이 조청에 보고한 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한 내용이 있다.
 -이괄의 얼제(蘖弟) 해(邂)와 조카 노(櫓)등을 간성군에서 잡아 보낼 적에 이괄이 도성에 들어가 반란을 이르켰다는 말을 듣고 달아났다. 노는 잡아서 엄히 가두었고 해는 현재 추적중이다. 그리고 이괄의 서처(庶妻) 이원(李瑗)은 왕옥에서 탈출하여 적진에 들어가고 이방필(李邦弼)과 그의 아들 찬(璨),관(瓘) 등이 적진(이괄의 진영)에 들어가 전령(傳令)을 가지고 '홍천'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적이 패한 뒤에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있는 것을  모두 잡아서 효시하고, 수악 이방필은 엄히 가두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괄에 대한 전설은 아마도 이괄을 추종하던 이방필의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이곳에서 이괄의 행세를 하며 전설로 떠도는 이야기를 만든 주인공일 수도 있다.
이괄은 역적이지만 전설속의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글·사진 허 림(시인)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