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봉(약물산)’을 오른다.
공작산의 능선이 뻗어내려 ‘수리봉’을 이루고 다시 한 구비 솟아올라 ‘약물산’을 이루었다.
공작산 산행의 주능선이면서 ‘화양강’과 ‘수타계곡(덕치천)’을 굽어보며 자태를 뽐내는 요조숙녀 같은 산이다.
‘약수봉(약물산)’은 약물이 나오는 산이라는 뜻이다. 산 여기저기 곳곳에 약물샘이 있다.
약수봉(약물산)의 약수 중 가장 효험이 있는 약수는 굴운 작은골의 ‘고개네미약수’와 옥샘골의 ‘동굴약수’ 그리고 ‘동봉사 약수’를 들 수 있다.
옥수암 뒷편의 동굴약수는 말 그대로 옥수(玉水)였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 들어 수채를 놓고 관리를 하고있어 오가는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예전에는 동굴약수를 마시러 가는 도중, 뱀이나 불길한 것을 보고가면 물이 없어 못 먹고 왔다고 한다. 이 약물의 효과가 널리 알려지자 중풍환자 등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어 움막을 치거나 인근 농가의 헛간에서도 잠을 자며 약물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약물은 별효과가 없었다고 하고 또 이 약물을 마시면 바람이 났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이 약물을 마시고 바람이 난 것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산세와 연관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이 약물은 마치 여자가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생식기 자리, 즉 옥문혈(玉門穴)에서 솟은 샘물로 남자들이 이물을 먹으면 바람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이 한밤중에 개를 잡아 개가죽으로 약수를 덮어놓았는데, 그 후로 약물의 효과가 없어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약수봉(약물산)’은 558m의 나지막한 산이다. 수타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어렵지 않게 산행을 즐기고 계곡 트래킹을 즐기는 산이다. 가장 빨리 오르는 길은 ‘작은골고개’ 마루에서 들머리를 잡는 길이다.
임도를 따라 차가 고갯마루 까지 올라갈 수 있어 금방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가파른 길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엇이 산을 찾게 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르려고? 거기 산이 있어서?
한발씩 정상을 향하여 가는 동안 산과 그리고 자신과 나누는 대화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삶의 진정성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산이 갖고 있는 묵언의 철학과 생명의 보고인 모성적 심성은 내가 산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약수봉(약물산)’이 대중들에게 개방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약수봉 일원은 수타사 사찰림 이어서 예전에는 수타사 측에서 등산을 막은 적도 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주지 스님은 "약수봉은 신자들만 다니는 곳이 아니다. 일반인들도 마음대로 드나들어야 한다"고 일갈한 이후 등산로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이때 홍천군산악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등산로를 답사하며 거리를 실측하고 안내 푯말을 설치했다. 2003년의 일이다.
‘약수봉(약물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어디서 오르든 상관없지만 대략 여섯 곳으로 잡을 수 있다. 그중 ‘수타사’에서 오르는 길은 수타사 주차장에서 샘골 - 광산터 - 와동고개 - 삼형제 소나무를 경유하는 코스와 수타사 공작교와 용담 사이 옥수암골(옥샘골) - 동굴약수 - 삼형제 소나무를 경유하는 코스 그리고 용담에서 수타계곡 안으로 20분 거리인 철다리에서 조금 더 올라 ‘귀영소’에서 약수봉으로 직접 오르는 코스가 있다. 또 다른 길은 ‘동봉사’에서 ‘삼신각’을 지나 약수터 - 정상- 귀영소 하산 하는 길이 있고 ‘작은골고갯마루’에서 곧바로 정상으로 올라 전망대를 거쳐 동굴약수- 옥수암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와동에서 오르는 길은 수타골로 들어서서 줄베이(바위능선)를 따라 와동고개로 오르게 되는데 최근에는 발길이 뜸하다. 다만 전문산악인들은 이 줄베이를 따라 오르는 풍광을 즐기려 더러 찾기도 한다.
예전에는 많은 불자들이 와동 수태골 안막에서 ‘와동고개’를 넘어 ‘수타사’를 찾았다.
‘약수봉(약물산)’과 ‘무쇠말등’ 사이로 흐르는 ‘수타계곡’은 한 풍경 한다.
‘귀영소 너래바위와 구유처럼 생긴 바위 위를 흐르는 물빛과 물소리는 청아한 종소리처럼 마음속을 파고든다. 여름에 ‘약수봉(약물산)’에 오른 등산객들은 ‘귀영소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산을 오르며 쌓인 노독을 풀어낸다. 저 바위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물살에 씻어냈을까? 물살이 세찬 구유 속을 빠져나오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을 울림이 햇살에 반짝인다. 계곡을 물들였던 나무들도 화려한 외출을 끝내고 빈가지에 바람을 켜고 있다. 그 쓸쓸할 것만 같던 빈자리마다 눈이 내리고 겨울의 입김을 하얗게 불어 넣을 것이다.
겨울에도 수타 계곡을 찾는 이들의 기억 속에는 물살이 만들어낸 물방울 얼음과 구름물결의 얼음, 종유석처럼 자라난 얼음기둥 뿐만 아니라 눈꽃이 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바람이 불면 눈보라를 일으키며 소용돌이가 일고 내가 걷고 있는 계곡의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공명한다. 모든 기억은 뜻밖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문득 떠나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자신의 삶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그리움을 불러낸다. ‘귀영소’의 물소리처럼, 흘러가는 햇살처럼 곱게 물들었다 미련 없이 발아래 내려놓는 엄숙한 자연 앞에서 나는 자못 숙연하다.
천천히 계곡을 따라 가설된 등산로를 내려오면서 내안의 물소리들을 불러낸다. 그러다가 풍덩 ‘용담’으로 뛰어든다.
‘용담(龍覃)’ 속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굴이 있다고 한다. 명주꾸리 하나를 다 풀어도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생긴 굴이라 한다. 그 한 옆의 바위벽에는 용의 비늘 같은 무늬와 발자국이 남아있는데 승천하면서 밟았던 자국이라 한다.
용수(湧水)를 이루는 폭포 양편의 너래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용담은 장관이다.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전을 읽는 소리 같다. 하여 이곳에 잠깐 나왔던 스님들은 이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한다.
‘수타사(壽陀寺)’는 708년(신라 성덕왕 7)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우적산(牛跡山) 일월사’라 했다가 1457년(조선 세조 3) 현 위치로 옮기면서 ‘공작산 수타사(水墮寺)’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자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스님들이 이 용담에 빠져 목숨을 잃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순조 11년(1811)에는 ‘수타(水墮)’라는 두 글자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수타사(壽陀寺)’로 개칭하였다.
‘용담’을 건너 산길을 따라 오르면 암자터(지금은 헐어냈다)가 있고 그 뒤로 새롭게 조성된 ‘공작산 생태 숲’이 펼쳐진다. 아직 나무들은 작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노랗게 마른 잔디위로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다. 공원 한가운데 서있는 정자위에선 수타사를 찾은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마 가까운 동네에서 온듯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다 논이었지. 그러다가 몇 년은 잘 묵었을 게야. 이곳에 생태 숲이 들어선 건 잘 한일이지만 좀 더 자연적인 냄새가 났으면 어땠을까? 옛날에는 이곳 도랑에 미꾸라지도 많았는데 말이야.-

‘공작산 생태 숲’은 지난 2005년부터 총사업비 53억원을 들여 동면 덕치리 산1번지 163㏊의 면적에 조성됐다. 2009년 6월24일에 문을 연 ‘공작산 생태 숲’은 홍천군이 자생식물 유전자원을 보존과 산림생태계 연구기반 시설 확충을 위해 추진한 사업으로 생태숲교육관 및 전시시설, 교육체험생태 등산로, 수변관찰로, 역사문화 생태숲, 유전자원보존의 숲 등 다양한 숲 보존 및 체험 시설들로 찾는 이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숲 해설사와 함께 진행되는 숲체험 교실은 체험의 수준을 넘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 숲 해설사들이 찾은 ‘혼인목(연리목)’은 수타사를 찾는 사람들이 꼭 찾아보는 나무다.
혼인목은 연리목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연리지 또는 연리목, 연리근은 나무와 나무가 가깝게 살면서 하나의 나무로 가지와 가지가 붙어 영양분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을 연리지, 줄기와 줄기가 붙으면 연리목, 뿌리가 붙으면 연리근이라 한다.
‘공작산 생태숲’에서 볼 수 있는 혼인목은 뽕나무과의 가새뽕나무와 콩과인 아까시나무의 연리목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산다.
‘연리목’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신라 내물왕 7년 시조묘의 나무가 연리지를 이루고 있고, 고구려 양원왕2년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지를 이루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도 광종 24년 성종 6년에 연리지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상서로운 나무로 부부간의 금술이나 남녀 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연리목은 삶이란 몸과 마음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속에 뿌리 내리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연못 위로 만들어진 나무다리를 따라 돌아보고 ‘수타사 봉황문’ 앞에 섰다.
‘수타사(壽陀寺)’는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9번지 공작산(孔雀山)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한 때 일월사(日月寺), 수타사(水墮寺)라고 불렀다.
708년(신라 성덕왕 7)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우적산(牛跡山) 일월사라 했다 한다. (원효는 686년 입적했음) 이후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오다가 1457년(조선 세조 3) 현 위치로 옮기면서 ‘공작산 수타사(水墮寺)’라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병화로 완전히 불 탄 뒤 1636년(인조 14) 공잠(工岑)대사가 중건했고, 1644년 학준(學俊)스님이 건물을 확장했다.
그 뒤 1647년 계철(戒哲)과 승가(僧加)가 승당을 새로 건립했다. 1650년(효종 1) 도전이 정문을 세웠으며, 1658년 승해(僧海)와 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세웠다. 1670년(현종 11)정지(正持)와 정상(正尙), 천읍(天揖)이 대종을 주조하여 봉안했고, 1672년 여담(汝湛) 등이 사천왕상을 조성했다. 그 뒤에도 여민 등이 1683년(숙종9)까지 계속하여 청련당(靑蓮堂), 송월당 등의 건물들을 차례로 중건하여 옛 모습을 재현했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11년(순조 11)이다. 그 뒤에도 1861년(철종 12) 윤치(潤治)가 중수했고, 1878년(고종 15) 동선당(東禪棠 : 심우산방)을 중건하고 칠성각을 신축했다. 또한 1976년 심우산방을 중수했고, 이듬해 삼성각을 건립했으며, 1992년 관음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홍회루와 봉황문(또는천왕문), 심우산방, 요사채, 삼성각 등 이 있다. 이 중 대적광전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보장각’에는 <월인석보>(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8호) 제17권과 제18권이 보존되어 있고, 기단부와 옥개석만이 남아 있는 고려 말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이 절을 거쳐 간 스님들 중 청송(靑松), 기허, 서곡 찬연(1702-1768), 유화(遊華), 중봉, 홍파, 홍우 선천(1611-1689) 등의 부도가 있으며, 사리탑비는 서곡 찬연의 것만 남아 있다. <건봉사본말사적,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하나하나 둘러보며 메모를 하고 봉황문을 나와 소나무 숲 부도탑 앞을 지나니 메밀묵 같은 산그리메가 몸 위로 지난다. 일월(日月)의 경계를 걷고 있다.
‘신봉 약물산’에서 부터 ‘수타사’에 이르는 계곡은 금세 어둠에 들고 저녁 공양도 끝난 산사는 바람에 풍경하나 내걸어 놓는다.

밤마다 수타사에는
알 수 없는 고기가 나와 헤엄쳐 다닌다
연못은 보이지 않는데 물그림자 지고
바람 없는데 나뭇잎이 젖는다
어디 숨었다가
밤이면 나와 파문을 던지는 걸까
밤마다 수타사에는
바람결 지는 잣나무 숲 달빛 사이를 빠져나와
산문을 열어 놓고
만상의 매듭을 풀며
노니는 고기가 산다
풍경 끝 맞닿은 그대 가슴 울리며
먼 길을 열어 주는 목어가 산다

-목어-

수타사 추녀 끝에 서서 어둠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듣는다. ‘지왕동’ 작은 폭포에서 들은 물소리를 여기서 다시 듣는다. 어둠에 섞이기도 하고 햇살에 섞이기도 하면서 쉼 없이 흘러가는 동안 풍경은 얼마나 울었을까. 물은 또 몸을 뒤틀었을까.
‘수타사’- 몇 번씩 와 본 곳이지만 늘 새롭다. 더우기 초록세상 해피존 친구들과 함께 수타사를 찾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미리 둘러보며 메모를 하는 동안 그만 저녁을 맞았다. 내 사는 가까운 곳에 살아있는 역사 수타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수타사가 모든이들의 마음의 정원으로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달빛에 섞이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산문을 나섰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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