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冬(입동)
양력 11월 7∼8일경으로, 상강(霜降) 후 약 15일, 소설(小雪) 전 약 15일에 해당한다. 음력으로 10월 절기이다. 이날부터 겨울이라는 뜻에서 입동이라 부르고, 동양에서는 입동 후 3개월(음력 10∼12월)을 ‘겨울’이라고 한다.
늦가을을 지나 낙엽이 쌓이고 찬바람이 분다. 김장 시기는 입동 전후 1주일간이 적당하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근래에는 김장철이 늦어져 가고 있다.
물이 비로소 얼고, 땅이 처음으로 얼어붙으며 나는 겨울로 들어가고 있다.
11월은 첫눈과 함께 시작했다. 바람 불고 비가 오더니 드디어 새벽 눈이 내렸다. 아침에 나가보니 눈은 쌓이지 않았다. 바람에 얼음기가 묻어난다. 춥다.
옛날에는 첫눈을 선물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이야기다. 왕실에서 행해졌던 일종의 놀이였는데 첫눈을 받은 사람은 한턱을 내야 했다. 첫눈 오는 날 벌어진 이 놀이는 조선왕조실록(영인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왕(태종)이 첫 눈을 약이라 속여 내신 최유를 시켜 정종에게 보냈다. 첫눈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한턱을 내고, 만약 심부름 온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한턱을 낸다. 노상왕(정종)이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최유를 잡으라 했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
이는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진 풍속으로 첫눈 오는 날 이런 장난을 통해 만남도 갖고 회포를 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술이나 밥으로 한턱을 냈다.
농경사회에서 첫눈이 많이 온 다음 해에는 풍년이 오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실이나 사대부들은 눈의 흥취를 즐기면서 이런 재미난 장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귀미면’으로 들어갈 때 바쁘지 않으면 ‘여우고개’를 돌아가곤 한다. 길을 나설 때는 눈발이 희끗희끗 날렸다. 눈 내린 ‘이괄산성’의 풍경은 진경산수의 한 폭이다. 바위에 간신히 서 있는 소나무에 바람이 실리면 솔가지마다 쌓인 눈발이 반짝이며 날린다.
나는 귀를 열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푸른 하늘에 흩뿌리는 눈발을 본다. 겨울의 백미는 눈보라다.
‘노천’에 세 번째 탐사기행 들어가는 길.
‘지왕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다. 넘나들던 고개는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소니고개’를 넘어 ‘양지말’로 들어가다가 둑방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서야 한다.
‘지왕동’ 어귀 집을 지나면 비포장도로다.
‘지왕동’은 <금왕동(金王洞), 기왕동(岐王洞)>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마의태자라고도 함)이 횡성군 ‘탑산’으로 피난했다가 이 마을을 지나 ‘인제 김부리’로 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왕동’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살았다. 모두들 화전을 했다. 막상 안막까지 오르고 나니 아늑하다.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느껴졌다.
너른 버덩을 이루고 있고 산이 에둘렀고, 땅은 부드러웠다. 지금은 인삼밭이고 고추밭이지만 그들이 살았던 터는 아직도 삶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곳에 살고 싶다.
‘지왕동’은 ‘솔모정 수구메기’를 중심으로 ‘웃말’과 ‘아랫말’로 나뉜다. ‘지당골’과 ‘막터고개’밑까지는 ‘웃말’로 밋밋한 버덩이다. 고지대인데도 아직 고추가 파랗다. 된서리가 안 내렸나 보다. 양지바른데다가 산이 감싸고 있는 까닭일까? 능선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이토록 편한 자리가 있다니!
‘막터고개’에서 ‘공작산’으로 오르기도 하고 ‘큰터골’을 지나 ‘왕터’로 가기도 했다. 또한 ‘수구메기’ 아래골짜기에서 ‘연재고개’를 넘어 ‘궁지기’로 가기도 했다.
이곳 ‘솔모정 수구메기’는 풍수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앞이 허한 것을 보하고, 마을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웃말 솔모정 수구메기에서 아랫말로 내려오다 보면 ‘서낭메기’를 지나게 된다. 서낭당이 있었고 당목은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절개와 지조의 나무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푸른 마음 변하지 않는 소나무 한그루씩을 마음에 품고 산다. 쉼 없이 변하면서 그런 이름으로라도 살고 싶은 것이었다.
서낭당을 세워 자연히 마을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그런 세대를 몇 대를 걸쳤을까? 일제의 수탈도 견뎌내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의 삽질이 시작되었다. 결국 서낭당소나무는 영귀미면의 청사를 짓는데 재목으로 바쳤다고 한다.
작은 실개천을 건너면 ‘지왕동’의 폭포가 긴 암반을 따라 이어진다. 물은 쇠오줌만큼 흐르지만 마을사람들은 이곳의 폭포수 아래서 여름을 즐겼다.
바위는 위엄 있고 물은 맑고 청아하다. 작은 물줄기가 이루는 소에는 가재가 집을 짓고 버들치가 모여 살고 있다. 낙엽을 뒤적이자 겨울잠을 자러 산에서 내려온 북방산 개구리가 더 깊은 물속으로 헤엄쳐간다.
두 번째 폭포는 긴 너래 반석을 따라 흐르다가 사뿐 뛰어 내린다. 폭포주변을 둘러싼 신나무와 단풍나무, 팥배나무, 물푸레나무는 이미 빈가지이거나 빛바랜 낙엽을 흔들고 서있다.
폭포수를 이루는 구간이 워낙 급경사다보니 길도 가파르다. 이곳만 시멘트 포장을 했는데 눈이 내리고 얼어붙으면 다니기 어렵겠다..
다시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하루 종일 그늘이 깊은 ‘음터골’은 ‘막골’과 마주하고, 한참 걸어 내려오면 사방댐이 있다. ‘작은지우레이’에도 사람이 살았는데 농사짓기보다는 약초를 캐던 홀아비였다고 한다.
‘장막봉’이 마을 어귀를 막고 서있는 ‘지왕동’의 안막은 이제 공작산자락으로 숨어들고 나는 너래 바위에 앉아 돌아온 길의 저편을 바라본다.

새들이 날아든다 어둑어둑하니
방금 지나온 길이 지워지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기 위하여
-숲-

‘큰지우레이’를 지나 굽이를 돌면 ‘지왕동’ 어귀를 지키고 있는 집이 보인다. 다 내려온 것이다. 산속을 헤매다 집을 보니 반갑다.
‘지왕동’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함께 ‘물굽이’로 돌아든다.
‘물굽이’부터 ‘신봉’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바람소리로 가득하다. 가을에 만난 바람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나무에서 가을빛이 묻어났다.
‘형제바위’가 물속에 발을 담그고 서있다. 지금도 이곳은 노천초등학교의 소풍장소일까? 노천서 학교 다닐 때 수타사 한번 다녀온 것 말고, 이곳은 봄가을 단골 소풍장소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보물찾기를 하고 학년별 노래자랑도 했다.
그 시절은 가난이 깊었다. 그래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독한 가난이 겨울바람처럼 흔들어 놓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모든 추억을 가을빛에 물들 물소리에 실려 보낸다.
그 물소리를 따라 ‘물굽이’를 돌아 귀영소로 내려간다. 어느 계곡이나 강가에는 ‘귀영소’가 있다. 다분히 소구유를 닮은 탓이기도 하지만 이곳의 ‘귀영소’ 마의태자가 말을 타고 가다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셔 구유가 되었다는 전설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면 ‘용소배기’고 좀 더 내려가면 ‘가마소’다. 물이 휘돌아 잠겼다가 이내 물포래를 일으키며 부서진다.
‘용소배기’에는 무당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무당이 굿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용소배기’에서 ‘문바위골’로 들어서면 ‘거묵골’을 지나 ‘참나무골’- ‘큰안말’ 막치미가 나온다. 마을에서는 이 길을 따라 나물 뜯으러 다녔던 길이었다.
나지막한 ‘단봉산’의 봉우리에 햇살이 걸린다. 엎드려 물을 마시고 나니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왕터’로 가는 작은 오솔길이 나있다. 왕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신라의 마의태자가 머물렀다고도 하는 이곳은 정말 첩첩산중이다.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은 왕씨나 마의태자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은 누군가 농사지으러 왔다가 쉬기도 하는 농막이 고추밭가에 서있다.
‘왕터’는 ‘수리봉’과 ‘단봉산’을 잇는 능선 사이의 구릉지대로 그리 너른 편은 아니었다. 다만 몇 가구 정도 문명에 욕심내지 않고 지내기에는 그만인 곳으로 정말 산을 기대고 자연을 기대어 살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왕터’로 들어가는 길은 ‘맛바위(미암)’를 거쳐 가던가 아니면 계곡을 따라 가는 수밖에 없다.
‘노천 지왕동’ 어귀 ‘물굽이’부터 ‘왕터’를 지나 ‘삼막골’ 어귀에 이르는 계곡을 ‘물굽이계곡’이라 한다. 물 좋고 바람 좋은 곳을 찾아 하루 정도 여행하고 싶다면 권할만한 곳이다.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넉넉한 개울이 있고 계절을 반길 줄 아는 나무와 꽃들이 있고 적당히 거세지도 않으면서 청아한 물소리를 내는 작은 소와 여울이 있다.
여울에는 토종물고기가 많다. 얼룩동사리(뚝지), 쉬리, 미꾸리, 꺾지, 버들치, 산골메기(미유기)등이 산다. 이들은 겁도 없이 발자국소리를 들으면 얼굴을 내밀고 내다본다.
이 길도 예전에는 세상으로 통하던 길이었다. ‘삼막골’ 어귀에는 등잔불을 켜고 고집스럽게 사는 노인이 있는데, 불편하다면 나이 들어 얻은 세월의 병이랄까?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 주루목에 물건을 담아 ‘다라재’를 넘어 ‘신방너머’ ‘맛바위’ 종점까지 걸어와 버스를 기다린다.
삼막골에서 개울을 따라 내려오면 ‘논골’ 어귀다.
‘속초 붉은봉(주봉)’에서 ‘하우고개’를 넘어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논골 안말’인데 ‘작은안골’과 ‘큰안골’이 있으며 ‘율매재’를 넘으면 작은 암자가 있다. 암자에서 골짜기를 내려가면 귀영소가 있다.
‘신봉’에는 ‘귀영소’가 두 곳에 있다. ‘노천 물굽이’- ‘신봉’ 사이와 ‘신봉’ - ‘수타사’ 사이에 있는데 움푹 파인 암반 사이로 옥빛의 물이 흘러내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신봉’은 ‘논골’과 ‘궁터’, ‘맛바위’, ‘왕터’, ‘작은골 ’, ‘하우고개’, ‘율매재’를 합쳐 마을을 이루고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약물산(약수봉)과 수리봉, 단봉산이 굽어보는 마을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신봉’을 이야기할 때 지금은 ‘동봉사’를 맨 앞에 놓는다. ‘동봉사(주지 동청스님)’는 ‘약물산’ 아래 자리 잡은 작은 절이다. 오래된 절이 아니지만 성불을 이룬 돌탑을 쌓으며 성불을 이룬 아름다운 절이다.
동청스님은 1992년 42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불교에 입문한다. 그리고 ‘신봉리 약수봉’ 아래 자리 잡고 불사를 이루기 위한 수행을 쌓는다. 돌탑 쌓기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리에 이르는 삶은 무엇인지 마음에 품고 108개의 돌탑을 쌓기로 결심을 한다. 돌탑들이 하나씩하나씩 수행의 도량에 자리 잡으면서 약수봉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수봉’의 약수터로 오르는 등산로를 개설하고 날마다 약수터를 찾는다. 약수터 앞에 쌓은 돌탑은 스님이 하나씩 날라다 쌓아올린 불심이라 할 수 있다.
‘동봉사’ 동청스님은 현재 ‘신봉리’ 이장이다. 52가구 13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신봉리 주민들의 뜻과 ‘부처님 가르침을 포교하듯 마을의 중생도 널리 살피라’는 종단의 큰스님의 재가를 얻어 이장직을 수락했다. 부처를 섬기듯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산촌체험마을로 거듭나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봉사’가 자리 잡은 ‘맛바위(미암)’는 ‘작은골고개’ 아래다. 약물산(약수봉)과 ‘수리봉’사이를 잇는 ‘작은골고개’는 ‘굴운’과 ‘신봉’에서 같이 붙인 이름이다. ‘굴운’의 ‘작은골’과 ‘신봉’의 ‘작은골’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신봉’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고개였다. 고개를 넘으면 홍천이 그만큼 가까웠기 때문이다.
‘작은골고개’마루로 올랐다. 공작산, 수타사, 약수봉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굴운 작은골’이다.
다시 임도를 따라 ‘신봉’으로 내려오다가 너른 버덩이 나오는데 마을에서는 ‘덕우’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도 있고 지금도 농사를 지으러 올라 다닌다.
맛바위 맛바위를 되뇌이며 내려왔으나 ‘맛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맛바위’의 유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한자로 풀어볼 때 맛이 나는 바위라는 뜻으로 ‘미암(味岩)’은 ‘약물바위’를 두고 부르는 지명이거나 아니면 ‘소금 맛’을 내는 바위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소금바위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아마도 ‘약수봉 석간수’를 두고 말하지 않겠냐고 마을사람들은 귀뜸해 주었다.
‘약물산’과 ‘수리봉’이 양 어깨를 한 ‘미암’은 ‘작은골’의 ‘동봉사’와 ‘수리봉’ 아래의 ‘살나무터’가 있다. ‘살나무터’는 ‘왕터’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살나무터’로 오르다가 ‘신방너머’에서 ‘다라재’를 넘어 개울을 따라 ‘삼막골’로 가기도 했다.
다시 ‘동봉사’ 앞으로 내려와 약수터로 오른다. 동봉사 미륵석불과 연못속의 잉어 그리고 도량을 가득 메운 118개의 돌탑들이 서있다.
탑을 이룬 돌들을 바라본다. 몸에 몸을 얹어 서로의 몸을 밀어 올리며 귀의하듯 모든 돌들의 돌 하나를 머리에 얹는다. 잠자리가 앉으며 중심을 잡는다.
공양간 겸 요사채랄까? 그 옆의 법당에선 반야심경<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반야바라밀다 계통 경전들의 정수를 뽑아놓은 극히 짧은 경>이 낮게 울려나오고 있다.
약수터로 오르는 길 중간에 동봉사의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세 번 옮겨 자리 잡은 산신각은 돌탑 속에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약수터로 오른다. 먼 길은 아니지만 좀 가파르다.
숨이 차다 싶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는데 돌탑이 보인다. 약물바위 앞이다. 약물은 동굴 안 바위틈에서 스며 나왔다. 석간수다. 그 옆에는 커다란 말벌집이 있다.
‘약물바위’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약수봉’ 정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약수봉’ 정상까지는 왔다가 정작 ‘약물바위’의 약물을 마시지 못하고 간다고 한다. 약물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약물산 정상에서 약물바위로 이어지는 이정표를 세워 ‘약물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목을 축이고 약물을 마실 수 있는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약물산’ 산행과 ‘수타사계곡’으로 이어지는 트래킹은 수타사와 함께 둘러보기로 하고 ‘궁터’로 올랐다.
‘궁터’는 마을지형이 활처럼 생긴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궁터’로 들어가는 길은 셋이다. 그중 ‘큰하우고개’를 넘어 들어가는 길과 ‘고모래봉’을 돌아 오르는 길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작은하우고개’로 ‘붉은봉’으로 넘나들던 길이다.
절이 있던 ‘무태(무티)골’과 ‘노산발’ 그리고 ‘뒷골’이 전부지만 마을을 아늑하고 조용하다. ‘무태골’의 작은 암자에는 시주를 받아 불공을 드리며 도를 닦는 스님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스님은 불공은 뒷전이고 아녀자들과 동침을 하는 등 외도가 심해 주민들로 부터 마을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 후 몇해 동안 다른 스님들도 오지 않자 마을의 한 부자가 절 마루를 뜯어다가 뒤주를 만들고 싶어했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머슴을 시켜 절마루를 뜯어다가 뒤주를 만들게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부자는 망하고 죽었는데 후손들이 뒤주를 헐어 절을 보수하고 불공을 드리고 그곳을 떠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궁터’ 어귀에서 앞산을 보면‘ 약물산’ ‘수리봉’ 그리고 ‘단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 빛 고운 만추의 그리움이 묻어난다.
늦은 김에 하우고개를 넘어 ‘후동 동막골’ 시골집에 들러 어머니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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