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강을 따라 오고, 또 강이 길을 따라 오기도 하는 동면 영귀미길.
오룡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리 멀어 보이는지 읍내 한번 나가려면 하루 일이었는데 지금은 10분 거리의 이웃 마을이 되었다.
동면(영귀미면)은 고려 현종9년(1018년)에 홍천현에 예속됐던 지역이었고, 조선 고종32년(1895년)에 홍천군 영귀미면(詠歸美面)이라 불리었는데, 속초, 신봉, 덕치, 성전, 수동, 삼현, 방량, 월운, 후동, 개운, 노천, 좌운 등 12개리를 관할했다.
이후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성전, 수동의 2개리를 합하여 성수리라 칭하고 11개리로 개편하였으며, 1917년 10월1일에는 홍천읍의 동쪽이라 하여 홍천군 동면이라 칭해졌다. 이런 연고로 매년 10월1일은 동면 영귀미 면민의 날로 면민 모두가 모여 한마당 잔치를 벌인다.
이번 탐사 기행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검율 야루정’에서 출발했다.
영귀미면 각 마을마다 뒷산에는 큰 산이 자리하고 있고 그 산 기슭에서 비롯되는 물줄기는 큰 개울을 이루어 흐른다. 물이 만나는 곳에서 길이 만나고 다시 큰 길을 이루며 강물 따라 이어진다.
영귀미면을 실핏줄을 이루듯 흐르는 큰 개울은 ‘덕치천’, ‘성수천’, ‘개운천’, ‘월운천’, ‘둔지천’ 등이다. 그 중 물줄기가 제일 길고 깊은 개울은 ‘덕치천’, ‘둔지천’으로 이어지는 개울이다. 이 개울을 따라 ‘덕치리’와 ‘신봉리’, ‘노천리’를 둘러보며 ‘노천 물골’까지 올랐다.
일단 강을 따라 오르는 가을의 여정은 아름다웠다. 산도 단풍이 들고 물빛도 맑고 곱다.
‘검율리 야루정’ 앞 이괄바위를 바라보며 잠수교(일명 콧구멍 다리)를 건너 강둑을 따라 ‘여우고개’를 돌아든다.
둑방길이 끝나고 다시 다리를 건너 여우고개 밑 ‘소군이(소구니)다리’를 건넌다.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산그늘 깊은 바위벼랑을 끼고 돌아간다.
‘덕치천’과 ‘화양강’이 만나는 어귀에서 영귀미(詠歸美)로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합수머리는 ‘성수천(성전천)’과 ‘덕치천’이 만나는 ‘사직이’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강을 따라 오르면서 홍천 용씨 사당이 자리하는 ‘단봉산’을 돌아 ‘절안’으로 들어선다.
‘절안’에는 영서지역의 천년고찰 ‘수타사’가 자리하고, 2009년에 문을 연 ‘공작산 생태 숲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개울을 따라서 계곡 트랭킹이 시작된다. ‘용담’을 지나 ‘귀영소’를 지나면 ‘약수봉’을 끼고 흐르는 ‘신봉’이다.
‘신봉’에서 ‘노천’으로 이어지는 ‘물굽이’ 계곡은 물소리가 아름다운 사색 길이다. 계절마다 느낌이 다른 색감과 음정이 나온다. 걷다가 풍경에 흠뻑 빠지면 눈을 감고 귀를 연다. 관음으로 통하는 세계는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 아닐까?
고향이 이곳인 까닭에 그 아름다움을 보며 마음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아름다움은 찾아내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이다. 심미안(審美眼)을 갖는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노천’은 넓다. 그래서 부르는 이름도 ‘노랫골’, ‘노래골’, 또는 ‘노내동(魯內洞)’, ‘노래동(魯來洞)’, ‘노천(魯川)’, ‘노촌(魯村)’ 등 많다. 서석 내면으로 가는 444번 지방도로와 ‘화방’, ‘좌운’, ‘공근’으로 이어지는 406번 지나고, 마을을 감싸는 높은 산들이 에두르고 있으며 그 품안에 ‘공작동(궁지기)’, ‘물골’, ‘새목’, ‘화방’, ‘덕우’, ‘솔골(송곡동)’, ‘양밭터’, ‘노장’, ‘노내골’, ‘효죽’, ‘장거리’, ‘노현’, ‘양지말(새말)’, ‘지왕동’에 부락을 이루고 있다.
‘둔지천’은 크게 ‘공작동(궁지기)’과 ‘물골’, ‘노내골’, ‘지왕동’의 물줄기가 흘러든다.
‘소니골’의 물을 받아 가둔 속초저수지를 지나 소니고개를 넘으면 ‘노현’이다.
‘노현(弩峴)’의 ‘弩’ 자는 ‘쇠뇌’를 뜻하는데 ‘쇠뇌’가 변하여 소니가 되었다고 한다. ‘쇠뇌’는 활의 일종이지만 활보다 더 멀리 쏠 수 있고, 살상력이 더 강한 무기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여러 개의 화살이나 낫, 돌을 줄에 매달아 건드리면 내리칠 수 있도록 만든 소니를 만들어 설치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큰길이 나서 무서울 게 없지만 예전에는 좁고 험산 산길이라 맹수(표범이나 호랑이)들이 나타나 고개 넘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맹수를 잡기위해 소니를 많이 놓았다고 하여 ‘소니고개’라 한다.
‘소니고개’를 넘으면 ‘양지말(새말)’로 가는 길이 둔덕 아래로 이어지고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물굽이’이다. ‘양짓말(새말’)은 조일현 전 국회의원이 태어난 부락이다. 마을 뒤로 뒷골이 있고 앞으로는 너른 뜰이 펼쳐진다. 그 뜰은 ‘뒷말 노장’ 앞뜰까지 이어진다.
‘노장’은 <노쟁이, 노장리(老壯里), 노장촌(魯壯村), 노산정이> 조선시대 말엽에 허순동이 ‘노산정’을 짓고 남은 해를 보냈다고 하여 붙여졌는데, 정자가 어디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장거리로 들어서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약바터’다. ‘약바터<약마대(躍馬垈), 약마터>’로 오르면 ‘개고개’와 ‘먹방골’로 갈라지는데 양쪽 길 어귀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지금은 먹방골 어귀 서낭당에서만 제를 올린다.
약바터 뒷산은 ‘행상봉’으로 생긴 모양이 행상(상여)같다 하여 붙여졌는데 화채봉, 응곡산이라고도 부른다. ‘개고개’의 ‘개(蓋)’자는 ‘일산(日傘:볕을 가리기 위한 큰 비단 양산. 의장(儀丈)의 한 가지)’을 뜻한다. 옛날에 원님이 이 고개를 넘다가 일산을 꽂아놓고 쉬었다가 넘었다고 하여 생긴 고개다.
예전에 ‘개고개’를 넘어 ‘좌운’까지 횃불싸움을 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2학년부터 5학년까지 노천초등학교(지금은 속초초교 노천분교장)에 다녔던 그 시절인데,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당시 장거리의 하늘색 양철지붕의 이층집은 아직도 건재하고, 개울가에 소나무가 서 있었던 우물터, 그리고 대장간, 사진관과 집집마다 달려있던 라디오 스피커는 아직도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노천초등학교’의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고 미루나무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으며 수양버드나무도 바람에 머릿결을 흩날리기도 했다.
‘장거리’를 이루던 ‘평촌’ 뒷버덩에는 재건학교가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은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뒷편 ‘돌봉산’에 올라 놀던 일들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학교를 지나 울타리를 끼고 따라 오르면 ‘솔골’이다. ‘솔골’은 소나무가 많았다. ‘안솔골’, ‘바깥솔골’로 나뉘는데 ‘안솔골’은 ‘제1야전수송교육단’이 자리잡고 있으며, ‘바깥솔골’에는 유명한 ‘옻물(구새우물)’이 있다.
물이 흔해 여름이면 등목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인근 농가에서는 이 옻 물을 끌어다 식수로 쓴다.
마을 뒤로 ‘비룡산’과 ‘덕구산’을 잇는 능선이 에두르고 ‘진골’과 ‘가는골’, ‘설통바위골’, ‘메물골’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솔골’을 돌아내려와 ‘덕우삼거리’에서 ‘덕우’로 오른다. ‘덕우를’ 지나면 ‘새목’이다. 길고 완만한 고개다. ‘화방’ ‘좌운’으로 이어지는 406지방도로는 새목처럼 긴 이 고개를 넘어간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새목’, ‘새목이고개’ ,‘조항’ 또는 ‘장승재’라 하는데 이곳은 노천2리지만 물줄기는 ‘둔지천’으로 흘러들어 ‘화양강’과 합류한다.
그러나 ‘새목이고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의병활동과 화방의 전설을 중심으로 다시 찾기로 하고 ‘덕우’로 내려왔다. ‘덕우’는 ‘덕구산’ 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는 비룡산이 있을 뿐 ‘덕구산’은 보이지 않는다. 덕구산은 돌봉산의 주산으로 ‘개고개’를 넘는 ‘양바터’의 오른쪽 봉우리라 한다.
‘덕우’는 ‘노천의 공작마을(웰빙 건강마을)’의 중심마을이다. 2006년 삼성증권과 1사1촌 자매결연을 맺고 해마다 영농체험, 농산물 알뜰 시장 등 다양한 행사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산더덕과 장뇌산삼을 중점적으로 재배하고 있어 웰빙 건강마을로 각광받고 있다. ‘덕우’의 ‘큰골’은 비룡산의 턱밑에 자리한 마을로 ‘약초 마을재배단지’이고 ‘밤나무골’. ‘느릅나무골’을 지나 ‘바른골’로 들어서면 ‘독무대버덩’을 지나 ‘새목’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고갯길이 있었으며, 안막으로 들어서서 ‘황경나무골’을 지나 벌을 받으러 ‘설통바위’까지 다니곤 했다.
덕우에는 마을 정자목이자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독바위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독바위’로 이어지는 ‘불당골’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덕우삼거리’에서 ‘공작동’, ‘물골’로 오른다. ‘덕우삼거리’를 ‘점간께’라고 하고 다리를 ‘점깐다리’라 하는데 이곳에 점간 (대장간)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보습 등을 벼렸다.
다리를 건너면 ‘노내골’ 어귀다. 이곳을 ‘효죽’이라고도 하고 ‘솟대배기’라고도 한다. 집성촌을 이룬 염씨(廉氏)네가 노내골 안 부락을 개척하고 마을 어귀에 솟대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 노내골에는 염씨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그곳에는 염씨 제당이 있어 명절 때면 찾아와 예를 다 한다.
‘노내골’에는 비행기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주로 나무를 해다 팔았는데 지게에 장작을 잔뜩 짊고도 비행기처럼 걸음이 빠른 것을 두고 붙여진 별명이다.
지금 ‘노내골’에는 ‘배계화의 장이야기’라는 소문난 된장집이 있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 청국장은 이집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명품 상품이다.
정선이 고향인 배계화씨는 명품 된장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을 누볐다고 한다. 그러다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습도를 맞출 수 있는 작은 계곡도 있고 산림으로 둘러 싸여 공기 맑고 물 맑은 곳을 찾은 곳이 이곳이라 한다.
안성 맞춤 항아리를 준비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 고유의 콩인 밤콩을 재배하여 전량 수매하고, 소금은 2년 이상 간수를 뺀 송화가루 천일염과 지하 180m암반수로 장을 담근다.
12월말께 가마솥에 메주를 쑤어 황토방에 매달아 놓고 벽난로에 참나무로 불을 때어 섭씨 30도로 온도를 맞추어 두 달 정도 건조 숙성시킨 다음 음력 정월 말날 된장을 담근다고 한다. 각 시기에 맞추어 메주만들기, 간장담기, 간장빼기 등의 체험학습 농장을 계획하고 있는 배계화씨는 이 지역에서 나오는 좋은 먹거리를 소개하고 우리나라 전통된장을 맛있게 제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홍보대사역할도 계획하고 있다.
마당 가득히 항아리가 놓인 풍경은 마음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노내골’로 들어서면 ‘독바위산’이 자리하고 안막에서 고개를 넘어 ‘늘목’으로 다녔다고 한다.
‘노내골’ 어귀를 ‘효죽’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부모를 섬기려는 아들의 효심이 전해내려 온다.
옛날 솟대배기에 두 아들을 둔 홀아비 홍씨가 살았다. 어느 해 겨울 홍씨가 병으로 눕자 형제는 날마다 공작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드린 지 석 달 열흘이 되던 날 두 아들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죽순을 삶은 물을 먹으면 아버지의 병환이 나으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날이 밝자마자 동생은 죽순을 구하러 길을 나섰고 형은 아버지를 구환하기로 하였다. 길을 떠난 동생은 죽순을 구하러 몇 달을 헤매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집 앞에 이르렀는데 신령의 뜻인지 눈 속에 솟아난 죽순을 보고 뜯어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날 운명을 하고 말았다는 말에 너무나 원통해 사흘 밤낮을 울다가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그 바위는 ‘불알봉’ 줄기의 산 정상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효죽’이라 부르고 그 바위를 형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노내골’ 건너편은 ‘웃노장’이다. ‘웃노장’에는 ‘허은수공 부인 유씨 열녀문’이 있다. 유씨는 허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시부모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고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삼년간 거친 음식을 먹으며 애도하였다. 그러던 병자년 봄에 지아비 허은수가 갑작스런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유씨는 남편의 대변을 맛보아 길흉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삼월 초나흘 날 남편이 거의 죽게 되자 유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주어 소생하여 생명을 연장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편은 죽고, 손수 바느질을 하여 예와 제를 다하여 상을 치루고 자신도 자결하였다고 한다.
‘효죽’에서 ‘공작동’으로 오르다가 오른쪽에는 ‘불알봉’이 있고 삼거리가 나온다. 공작동으로 들어서면 ‘공작산 저수지(노천저수지)’가 있는데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향어 잉어 붕어와 메기가 잘 낚이고, 특히 겨울에는 빙어축제를 연다.
‘당무’로 연결되는 길이 확포장되었고, 고갯마루는 산행 안내소가 있어 공작산 산행들머리를 잡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공작산’은 한국의 100대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과 동면에 걸쳐있는 공작산은 887m. 산꼭대기에서 사방으로 뻗은 능선이 공작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공작산이라 하였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탁 트인다. 가리산 백우산은 물론 동쪽으로 ‘응봉산(서석 황병골 수리봉)’, ‘대학산’, ‘비룡산’, ‘덕구산’, 에두르고 남쪽으로 길게 내리뻗은 ‘오음산’이 우뚝 선다.


산이 산을 보듬고
물이 물을 끌고 간다

산이 산을 불러 어울려 푸르러지는 것들아
물이 물을 받아들여 마음이 한결 맑아지는 것들아

산에선 나무로 살고
강에선 물로 살자구나
- 궁지기에서 -

‘공작산’은 남쪽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꼬리를 활짝 편 공작의 형상이다. 이는 정상 일대 능선의 안부와 그들 바위 주변에 밀생한 짙은 수림 덕분이다.
공작산은 어디서 보고 오르든 모든 풍경은 오감으로 와 닿는다. ‘군업 뜸메기골’의 ‘공작폭포’와 ‘공작동 문바위골’로 오르는 기암절벽, ‘공작고개’에서 오르는 참나무 숲, ‘굴운 큰골’에서 오르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 수타사에서 천천히 계곡을 따라 오르는 동안 물과 하나 되는 맑은 물소리는 공작이 펼쳐놓은 아름다움이다.
‘공작산’은 정상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산은 아니다. 오르면서 땀을 흘리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서 심미안을 기르는 산이다.
‘공작동’을 마을에서는 ‘궁직이’라 부른다. ‘궁지기’로 들어서면 ‘당무고개’로 넘는 ‘질골’과 공작산 턱밑으로 이어지는 ‘새골’, 골 어귀에 대문처럼 마주 선 ‘문바위골’, 그리고 공작산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가는골’이 있다. 그 중 ‘가는골’ 막치미를 ‘궁지기’라고 따로 부르는데 그런 까닭에 자궁처럼 고요하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궁지기는 사방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했다. ‘옹기점재’를 넘어 ‘굴운 큰골’로 가지고, ‘꿩골’로 들어서서 ‘안공작재’를 넘어 ‘군업 턱골(밤나무골)’로 가기도 했으며 ‘금정굴’을 지나 ‘공작폭포’를 돌아보며 ‘뜸메기골’로 넘어 다니기도 했다. 또한 ‘호덫고개(호랑이를 잡으려고 덫을 놓았다 함. 일명 연재고개)’를 지나 ‘지왕동’으로 가기도 했다. 그 중심에 ‘공작산 자연 휴양림’이 자리한다.
공작산 자연 휴양림은 웅장한 산세의 공작산(해발 887m)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개인이 운영하는 휴양림이다. 공작산의 아름다움을 조용하고 아늑한 휴식과 함께 계절마다 즐길 수 있다. 자연석, 흙, 통나무, 숯 등을 이용해 별장식으로 지은 독립형 황토통나무산장에서 문을 열고 바라보는 공작산의 풍경은 신비에 가깝다. 함초롬히 눈을 뜨는 생명의 눈맞춤이나 첫 눈 내린 날의 고혹함, 눈꽃이 피어나는 겨울아침의 풍경은 장관이다. 또한 주변에 널린 더덕, 약초, 산나물, 무공해 야채 등을 별미로 산속마을의 전원생활은 해가 저무는 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공작산’ 정상을 ‘시루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서 서쪽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안공작재’다. ‘안공작재’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공작골 주민들은 '옹기점재'라 부르며 옛날 옹기장수가 재를 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옹기 지게만 남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공작산 정상인 ‘시루봉’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옹기점재’를 지나 내려오면 ‘푯대봉’이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지왕동’이 나온다. 발길을 돌려 공작산 저수지로 나왔다. 해마다 열리는 공작산저수지 빙어축제가 기다려진다. 빙어낚시, 얼음축구, 얼음썰매타기, 제기차기, 투호경기, 연날리기 등 얼음판에서 마시는 막걸리가 기억났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람과 삶을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웃음이 공작산 골골이 스며들어 모든 이들의 행복으로 꽃피우기를 공작산 산신께 발원’하며 ‘지왕동’으로 향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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