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자전거를 타고 ‘결운리’로 달렸다. 안개가 깊다.
옛 44번 국도.‘대기고개’를 넘어 신행정타운이 들어선 경찰서 앞을 지나고, 종합운동장 어귀를 지나 ‘여내골’ 다리를 건너 ‘국립농산물검역소’를 지나 ‘홍천농업기술센터’ 앞에서 내렸다.
‘여내골’을 경계로 ‘태학리’와 ‘결운리’가 마을을 달리한다.
‘홍천 농업기술센터’가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포도원이 있었다. 한여름 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러와 미팅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포도원이 ‘여내골’ 어귀에 있어 포도밭에 간다고 하는 말보다 여내골 간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운리’는 산골이었다. 길옆으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오가는 차라고는 군인트럭이 대부분이었다.
‘결운리’가 산골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홍천농업고등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홍천농업고등학교’는 현 홍천여고에서 1946.5.31. 홍천초급중학교 3년제 6학급으로 설립인가를 얻어 개교한 후 홍천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 후 1951. 8.31. 홍천농업고등학교 농업과 6학급으로 다시 설립인가를 얻어 홍천중학교와 분리되어 1974. 4. 21.현 위치로 교사 이전하게 된다.
그 후 1996. 3.1.농업경영과 3학급과 식품가공과 1학급 등 12학급으로 학교 편제가 개편되었고, 2009. 2. 21. 현재 제55회 졸업식을 맞아 총 7,3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74년 학교가 이전하면서 당시 학생들의 수업은 작업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돌밭이었고 둔덕진 숲속에 터를 닦아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더란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산업 역군을 배출하여 지역 사회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강원도 유일의 자영농업인을 양성하는 특수목적농업고등학교로 우뚝 서게 된다.
그때 심은 어린나무들은 이제 아름드리나무로 자랐고 지금 한창 곱게 단장을 하고 가을의 고적함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교문으로 들어서는 길옆에 잣나무가 하늘을 향해 기상과 생장의 푸르름을 손짓하고 있다.
결운리에 제일 먼저 자리잡은 학교는 주봉초등학교다. 1953년 4월10일 개교하였다. 주봉초등학교의 교가에는 두루봉이 나온다. 마을에서는 주봉(周峰)을 두루봉이라 한다. 또한 이 일대를 두루봉이라고 한다.
두루봉은 여내골 어귀에 두루뭉실하게 생긴 봉우리를 간직한 산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위협적이지 않은 이 산은 결운리와 태학리의 삶을 두루두루 굽어 살피는 산이다.
두루산에는 안양사(주지 박운곡)란 절이 자리하고 있다. 결운리(주봉)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홍천강과 동면(영귀미면)대학산, 공작산, 만대산, 먹방산, 오음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소구니에서 합수를 이루어 몸집을 키운 덕치천(성전천)의 물줄기를 만난다.
결운리와 검율리를 연결하는 연이은 다리위에서 읍내를 바라보니 대기고개는 안개에 휩싸여있고 강바닥을 보니 팔뚝만한 눈치 떼가 아침사냥을 하느라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당뿌리(검율리)에 맞 닿은 능지소 단애에 붉은 단풍이 물속에 비쳐든다.
결운정미소 일대는 삼베꼭지이다. 그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고모골이 나오고 더 이상 길은 없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내려와 ‘독점’으로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가면 산 밑을 돌아가는 둔덕을 지나 ‘장고개’를 넘어 ‘점말’어귀에 닿는다.
산밑으로 펼쳐진 뜰이 넓다. 뜰 끝자락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그 뒤편에는 ‘결운공민학교(재건학교)’건물이 들어서 있다. 배움에 목마른 마을 아이들을 위해 지금의 군부대막사(예전에는 야전병원이었다)에서 처음 교육을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최종순<1992년 작고.(주)금강운수 이사>씨는 지금의 터에 학교를 세운다. 손수 건물을 짓고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촌면 인근지역에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최종순씨가 결운공민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최종순씨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많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인재들에게 자동자정비소나 금강운수 안내양으로 취업을 시켜 사회의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당시의 교훈이 ‘밀알’이란 두 글자였는데 지금 사회의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삼베꼭지’에서 ‘큰골’로 넘는 나지막한 둔덕은 ‘서낭당고개’다. 예전에는 이 고개로 큰길이 나있었다. 서낭당고갯마루에는 보영산업이 들어섰지만 문닫은 상태다.
서낭당 고개를 넘어가면 물레방아가 있었다. 물레방아를 돌아 내려가면 바위가 기차처럼 줄지어 있었다는 ‘기차바위벼랑’이다.
부대 앞을 지나면 큰골 어귀다. 다슬기 해장국집과 정거장이 있고 그 뒤로 점말이 자리한다.
결운리는 본래 홍천군 화촌면의 ‘겨룬이’ 또는 ‘결운리(決雲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지’,‘ 점말’을 병합하여 다시 ‘결운리’라 하고 현내면(홍천읍)에 편입되었다고 홍천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결운리로 들어서면서 우선 ‘둔지’와 ‘점말’을 둘러보았다. ‘둔지’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들어 갈 수 없다. 군부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제법 큰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는데 군부대로 편입되면서 강가에 집을 짓고 살거나 외지로 이사를 갔다 한다.
‘둔지’를 둘러보다가 ‘절골’ 어귀에서 군부대와 접해있는 ‘사미정(思美亭)이구(李龜)선생’의 비를 보았다. 1977년에 세워진 이 비는 문중에서 세웠다.
중종실록에 이구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469(예종 1)∼1526(중종 21)시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장(子長), 호는 사미정(思美亭)이다, 고려 문충공 이익제의 7대손이며, 창평 현령을 지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 8형제중 둘째로 146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성종 23년(149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 예빈시 직장·예조 좌랑·고성 현감, 면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때 아우 이원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는 것에 연좌되어 홍천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이조 좌랑·호조 정랑·사헌부 지평·정언·교리·수찬·응교 등을 역임하고, 충주· 홍주·상주 목사, 이후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 홍천 결은리에서 은거하였다.
이구선생에게 있어서 홍천은 유배지였으며 은둔지였다. 10여년의 유배생활에서 벗어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어 벼슬길이 열려 장예원판결사(노비송사에 관한 판결 책임관)를 제수 받지만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다시 홍천으로 내려와 은둔을 결심하게 된다.
사미정공은 은거를 시작하면서 양신(良辰:좋은 때), 미경(美景:아름다운 경치), 상심(賞心:완성하는 마음), 락사(樂事:즐거운 일)라는 뜻의 ‘사미정(四美亭)’을 자신의 호로 삼고 화산현 구룡리(지금의 갈마곡리 대기고개)에 정자를 짓고 후배교육을 시작했다.
이구 선생은 홍천으로 유배를 온 문신가운데 기록에 남아있는 선비다. 홍천으로 유배 오게 된 이유는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사미정공의 동생 이원이 연루되었던 것으로 동생은 사형에 처하고 이구는 죄인의 형이라는 이유로 이곳으로 유배 길에 오른다.
‘조의제문'이란 성종 때 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이 항우가 초회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세조의 앙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뒤에 김종직의 문하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에 적어 넣었다.
그 후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극돈이 이글을 사초에서 발견하였는데 훈구파인 그는 사림파인 김종직, 김일손과는 사이가 좋지 않던 터라 이를 기화로 사림파를 몰아낼 목적으로 이 글이 단종을 조상하는 동시에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사화를 일으켰는데 연산군 4년에 일어났다 해서 무오사화로 불리고 있다. 
사미정공의 형제들 중 별은 평산 땅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당호를 장육당이라 하고, 세상을 풍자하는 노래 6곡을 지어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후에 퇴계이황 선생이 이를 개작하여 전6곡, 후6곡을 만들어 ‘도산12곡’을 남기게 되었다.
이구 선생은 장예원판결사를 사임하고 10여 년간 유배시절 정이 들었던 홍천으로 돌아와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내려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6년 11월13일 58세를 일기로 결은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운은 원래 이구 선생이‘은거를 결심하였다’하여 결은으로 불리우다 지금의 결운(결운)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
또한 ‘사미정’이란 정자가 세워졌던 대기고개 아래를‘새미정(사미정)소’라 부르고 있다.
이구의 묘소를 둘러보고 큰길로 나와 ‘야수교(제1야전수송교육단)’로 향했다.
길가에 둔지쉼터와 과수원이 있다. 과수원 할머니가 가을 햇살에 익은 끝물 포도를 따 바구니에 담아놓고 지지한 포도는 술을 담근다며 들고 들어간다.
구비를 돌아 내려가면 ‘야수교’다. 지금은 텅 비어 있다. 2003년 홍천읍 결운리 제1야전수송교육단(야수교)이 동면 노천 덕우로 이전하고, 홍천군이 국방부와 협의를 거쳐 54억2,300만원에 매입했다. 당초 이 부지를 군부대 시설을 활용한 청소년 병영 체험장으로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건물이 낡아 활용이 불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철거한 후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축제장이나 사회인 운동경기장으로 사용 되고 있다.
이곳은 군부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인가 보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했었고 그 후 비행장으로도 사용되다가 제1야전수송교육단이 들어서게 된다.
이와 함께 부대 앞쪽에는 식당과 여인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면회객들이 머물다가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이곳이 ‘베루도루(와동에서는 구름베루라 부르기도 함)’다. ‘베루도루’는 ‘만내골’이 화양강과 만나면서 바위벼랑을 이루었던 곳이다.
만내골 다리를 건너면 화천 송정이다. 다시 돌아서서 ‘점말 옹기골’로 발길을 돌렸다. 군부대가 떠나고 남은 돌담이 참 아름답다.
‘점말(점촌)’은 옹기를 굽던 곳이다. 큰길에서 ‘점말’로 들어서는 어귀는 ‘큰골’이다. 큰골 어귀에는 ‘와동 새터’로 건너다니던 뱃터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거릿말(거랫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옹기골’에서 나오는 물이 많다. 그만큼 골도 깊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 음심점이 나오고 왼쪽으로 오르는 길 끝에는 ‘결운공민학교터’가 있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서 ‘장고개’로 넘는 ‘안산골’이 나온다. ‘장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서낭고개’다.
‘옹기골’로 들어선다. 탄약대로 들어서는 논골 어귀를 지나면 ‘왱이골’이다. 혹시‘괭이골’이 아니냐고 다시 물어보았는데 아니라고 한다. 내력도 모른다.
교회를 지나 ‘진동골’과 ‘면악골’이 갈라지는 지점에 옹기막이 있었고 가마가 있었다.
지금은 고추밭으로 바뀌어 옹기터의 흔적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졌지만 이곳이 1982년에 ‘TV문학관-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를 촬영했던 중심 무대다.
지금은 영화나 TV촬영지가 새로운 로드 테마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문화상품이나 테마 관광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탓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전 양평에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양평’이란 지명이 나왔다는 사실하나로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졌는데, 홍천에서 촬영한 대하소설 토지(박경리)와 독짓는 늙은이(황순원), 동행(전상국) 등 수많은 촬영지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독짓는 늙은이’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삶에 대한 애착과 급변하는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 체계가 무너지는 가운데 우리의 전통에 대한 집념을 그려 낸 작품이다. 특히 전통적인 가치 체계의 붕괴를 겪는 세태에 대항하려고 하는 한 노인의 집념과 좌절을 보여 줌으로써, 격변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재현하고 있다.
당시 촬영의 중심 무대였던 옹기막과 가마, 초막 그리고 산촌의 배경은 물론 옹기골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옹기공장을 운영했던 김종해(아명 종성)씨는 지금도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당시에는 가마가 2개였다고 한다. 주로 화로를 많이 빚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옹기를 하게 된 까닭은 질 좋은 옹기 흙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보다 당시 탄압을 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 옹기를 빚었다고 한다.
따라서 가진 것이 없는 신자들이 생계를 위하여 할 수 있었던 것은 약초를 캐거나 옹기를 빚는 일이었다는데 ‘점말’이라는 지명은 그리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흔적은 없다.
옹기골은 흙길이라 자전거 타기가 좀 어렵다. 그러나 골막까지 오르는 개울가의 단풍이 너무 곱다. 이 골짜기에서 보는 단풍은 황금빛이다.
‘진골’과 ‘생나무터골’이 만나 이루는 버덩에는 컨테이너가 놓여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밤나무골’이 나오고 뱀막까지는 ‘참나무골’, ‘가래나무빈장골’, ‘고사리골’, ‘고개골’이 나오는데 거기서‘뒷뱅이고개’를 넘으면 북방 ‘성동’이 나온다. 거기까지 가려면 자전거도 내던져야 한다. 용교수가 산다는 컨테이너 앞에서 돌아서며 ‘덕밭골’, ‘순동골’, ‘째작나무골’, ‘산지골’, ‘낭떨어진골’, ‘범잡은골’을 지나면 ‘지네골’이다.
다시 옹기막을 생각한다. 아마 1989년 쯤 일인가 싶다. 홍영배 시인과 강대익 화가가 어느 날 사라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이 옹기막에 들어와 흙에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옹기막을 찾아가던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생생하게 찾아드는 시간처럼.
자전거를 타고 내달린다. ‘장고개’를 넘어 ‘삼베꼭지’로 나와 삼거리에서 태학교를 건너며 ‘능지소’를 본다.
‘능지소’에서 쏘가리를 잡거나 자라를 낚던 일들이나 주낙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모두 생생하다. 단풍이 빠져드는 저 능지소 속에서 자라가, 쏘가리가, 메기가 단풍놀이를 할 것 같다.
이제부터 벌력천의 또한 줄기 영귀미면(동면) 덕치천 (성전천)을 따라 올라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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