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포’의 아홉 꾸미는 물오른 단풍으로 붉다.
개울을 따라 걷는 좁은 오솔길에도 가을이 깊다. 강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풀숲으로 우거졌고 오랜 기억처럼 풀벌레가 크게 운다. 그런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색다른 묘미가 있다.
마차나 달구지를 끌고 가던 시절의 느긋함이 묻어난다. 흐르는 물처럼 또는 소처럼 길을 가는 사람들의 하루해는 길고 또 멀고, 세월 또한 급할 것이 없어 보였다.
계절마다 색다른 옷을 갈아입는 자연의 섭리.
변화와 순리를 받아들이며 사람으로서 살아가야하는 도리와 자세를 자연의 몸으로 느끼고, 인간의 몸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며 그렇게 살았던 삶의 흔적을 강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런 질곡의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을 들라면 속도를 꼽고 싶다. 문명의 속도만큼 마음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지 않은가?
‘안굽들이’에서 밤을 주워 까먹으며 지난여름 빨갛게 익은 자두를 따먹던 그 맛을 떠올리기도 하며 ‘안말’로 들어섰다.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자란 마당 그늘 아래 평상이 놓여있다. 그늘 한 끝에 자리 잡은 개집에서 낯선 이방인의 발자국소리에 놀란 개가 뛰어나오며 몹시 짖어댄다. 주인 할머니가 나와 나뭇가지로 개를 야단친다. 이놈의 개가 사람을 못 알아보다니?
‘안말’을 지나 ‘둔덕이’로 가다 밀성(밀양) 박씨 문중의 정문이 자리했던 박원환씨(78, 구성포 안말)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박씨 문중으로 시집 온 새댁은 갑자기 화재를 당하여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면서 자식들과 시부모를 성심껏 모셨다는데 안타깝게도 정문은 불타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족보에 남아있다.
‘구성포’에서 ‘안말’은 마을의 중심이었다. 서당이 있었으며 화촌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마을 아이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공회당 간이학교도 있었다.
‘둔덕이’를 오르기 전 길가에 느티나무가 서있다. 마을 보호수이자 정자목이다.
‘둔덕이’는 ‘진등고개’로 오르는 어귀이다. 고개를 따라 넘다보면 춘천박씨 문중의 선산과 밀성(밀양)박씨 문중의 선산이 한 골짜기씩 자리한다. 그 너머로 동서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교각 아래로 난 굴길을 따라 가다보면 군부대가 자리하고 그 어귀는 옛 44번 국도이자 ‘진등고갯마루’가 나온다.
그 어귀에 낯선 비석이 서있다. ‘박영균 효자비’이다. 거기서 고개를 넘으면 새로 난 44번국도가 나오고, 길 건너 벼랑 아래는 ‘광대소’다. 한때 소금배를 기다리던 뱃꾼들이 강 이편과 저편에 줄을 매고 타고 놀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은 그 벼랑 둔덕에 ‘삼포휴게소’와 ‘파빌리온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퍼즐 파빌리온박물관’ 세계 최초로 퍼즐(직소퍼즐, 2D, 3D, 페이퍼 아트)을 테마로 한 전시관이다. 주5일 근무제의 확산과 웰빙 열풍, 그리고 다운시프트 욕구에 따른 테마관광에 부합하여 설립되었다. 1층에는 평소에 보기 힘든 직소퍼즐과 입체퍼즐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퍼즐로 된 미술관으로 명화, 영화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퍼즐박물관’에서 다시 ‘신내’로 들어섰다. 홍천의 생명 건강의 상징물이 서있는 44번국도 ‘구성포(신내)나들목’에는 물레방아가 있는 찜질방이 자리하고 56번국도와 만나는 교차로에서 서석 쪽으로 들어서다보면 신내의 유일한 골짜기인 ‘여우골’을 지나 ‘전평(돈두루)’, ‘대진강변’으로 이어진다.
한강수계 홍천강을 따라 올라왔던 소금배가 마지막 포구에 닿았던 ‘신내’에서 뗏목을 띄우듯 ‘보송대(봉상대)’아래 ‘벼루바위(신내벼루바우)’를 돌아 ‘송정’으로 내려왔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한가운데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송정(松亭)’은 화양강을 사이에 두고 ‘굴운’과 마주하고 있다. ‘송정’과 ‘굴운’은 ‘송정교(굴운교)’가 놓이기 전까지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했던 강가의 마을이다.
다리가 놓인 그 자리가 바로 ‘뱃터’였다. ‘송정뱃터’는 강을 건너다니는 작은 나루터였지만 군부대 앞 강변의 ‘엄성대뱃터’는 엄성대(나중에는 송정뱃터에서 사공을 했다함)라는 사람이 배도 띄우고 ‘새점(새즘)’에서 만든 옹기를 한양으로 실어내며 장사를 하였다한다. 송정은 ‘버덩말’, ‘열골’, ‘만내골’, ‘신점(새점)’을 합쳐 부르는 지명이다.
‘버덩말’은 송정의 중심이다. ‘구송초등학교’와 마을회관이 있고 ‘천주교 송정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버덩말’을 따라 ‘열골’로 들어선다.
‘열골’은 송정에서 ‘구성포 논틀말’로 넘어가는 큰길이었다. 풍천리, 구성포길은 잼버리 도로가 나면서 큰길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논틀말’에서 ‘일고개(열고개-만내고개)’를 넘어 홍천장을 보러 다녔던 지름길이었다.
사람들은 ‘열골’을 ‘윗말’, ‘버덩말’을 ‘아랫말’로 부른다. ‘잣나무골’과 ‘구나무골’을 지나 ‘뒷골’ 어귀에 외로이 따로 떨어진 집이 ‘열골’의 마지막집이다. 길은 계속 이어져 동서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명당골’, ‘승지골’, ‘피난골(살구나무골)’을 지나 ‘열고개(일고개, 만내고개)’를 넘게 되지만 지금은 사격장이 들어서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열골’에서 ‘석골’로 들어서면 ‘만내 석골의 피난골’이 나온다. 열골에서는 ‘명당골’ 어귀에 보를 막아 물을 끌어와 벼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양수기로 화양강에서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는다.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나기에 들어섰더니 옥수수를 삶았다며 한 토생이 건넨다. 푹 삶아 밥이 툭 터진 옥수수는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지 않겠나!
‘잣나무골’로 들어서서 둔덕을 넘으니 군부대 후문으로 이어지고 돌아내려오니 송정방앗간 근처다. 이곳은 군부대가 있어 제법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새점말(즘:옹기점을 이루었던 부락을 두고 부르던 지명)’은 군부대 안에 있던 송정의 옹기점이었다. 이곳에서 빚은 옹기는 엄성대가 배에 싣고 한양까지 팔러 나갔다.
그 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버덩말(지금 경로당 앞)로 옹기점으로 옮겨 가마도 2개씩이나 짓고 대규모로 노리미(항아리)를 빚었다.
송정에서 마지막 도공은 박태환(작고)씨다. 지금은 가마도 물레도 옹기막도 사라지고 밭으로 바뀌었지만 도공의 안주인은 지금도 홍천읍내에서 옹기를 판다.
수소문 끝에 박태환씨와 함께 흙을 빚었던 심종국(75: 화촌면 송정리)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홍천의 소문난 가마터는 ‘연봉(함시문씨)’, ‘결운(큰골 김종성씨)’, ‘송정(박태환, 김학원씨)’, ‘굴운’이었다고 한다. 그중 '굴운 점말(즘말)'에서는 ‘꺼묵이’를 빗었다고 한다.
‘송정옹기점’에서는 양조장이 성했을 시절에는 술독을 많이 빚었고, 연탄이 나오면서는 연탄화덕을 빚기도 했으나 항아리와 화분은 꾸준히 빚었다고 한다. 당시의 도공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는데, 박해가 심해 옮겨 다니면서 옹기를 빚어 생을 부지하였다고 한다(내촌 물걸리 장수원의 점말이 대표적인 사례).
한때는 번성하였으나 양은그릇과 플라스틱 제품이 나오면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최근에는 숨 쉬는 항아리 -옹기(질그릇)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옹기는 남자의 성기모양과 여자의 자궁모양을 하고 있다. 수 천 년 전의 질그릇에서 더 진화하지 않은 옹기는 가장 더울 때와 가장 추울 때를 맞추어 스스로 진화하는 그릇이다.
옹기를 만드는 기술을 옹기장이라고도 하며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匠人) 또는 도공을 일컬어 옹기장이라 하기도 한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좋은 옹기를 고르려면 첫째 가득 차보여야 하고, 옹기는 딱 보면 침이 돌아야한다. 그런 옹기가 좋은 옹기다.
홍천지역의 마지막 도공 박태환씨가 작고한 뒤 송정의 옹기점도 문을 닫게 된다.
옹기장 박태환씨의 가마터에서 나와 '만내골'로 들어섰다. 어귀에는 오래된 건물이 서있는데 이곳이 '홍천 문화극장'이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만내골’은 ‘화촌면’과 ‘홍천읍’의 경계를 이룬다. 그러나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다. 골안으로 들어서면 개울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논이 펼쳐져있고 ‘열골 웃말’로 가던 ‘큰고개’와 ‘몽돌골’이 나있고, 개울건너 왼편으로 ‘버드나무골’, ‘친친내골’, ‘절골’을 지나면 동서고속도로가 나온다.
고속도로를 지나면 골짜기는 ‘석골’과 ‘바랑골’로 갈라진다. ‘석골’로 들어서면 ‘풍천리’, ‘도심이’로 이어지는데 어귀의 ‘향나무골’을 지나면 ‘열골’로 이어지는 ‘피아골(피난골)’, ‘무덤골’이 나온다.
‘만내개울’은 ‘바랑골’ 뱀막에서 시작되는데 어귀의 ‘군자시미골’, ‘가래울’을 지나 골을 따라 오르면 ‘도심이’, ‘성동’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다. 개울을 건너 골짜기를 오르면서 개울가에 단풍나무와 붉나무가 붉게 물든 가을을 맘껏 즐길 수 있다.
골은 가을과 함께 끝없이 깊어지고 ‘쐬기골’, ‘뒷방골’, ‘용가마골’, ‘불당골’, ‘구유골’을 지나면 ‘바랑골’ 뱀막이다.
‘만내골’은 ‘만천동(萬川洞)’이라고 하는데 봄이면 고사리가 많이 나고 삼지구엽초도 많아 약초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골이다.
‘만내골’에서 나와 ‘굴운교’를 건넌다. 다리근처의 ‘송정 뱃터’와 ‘굴운 포전(浦田)’은 풀이 우거지고 어디에도 뱃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달밭지리와 ‘포전뜰’사이로 마을길이 이어진다. 포전뜰에는 휴게소와 ‘홍천강 수라쌀’가공공장이 있고, 홍천의 5대 명품 수라쌀이 이곳에서 가공되어 홍천강 탑라이스, 햇곡원으로 소비자들을 찾아간다.
44번국도 지하 통로를 지나 ‘굴운’으로 들어섰다.
‘굴운’은 골짜기가 굴처럼 깊다 한데서 생겨난 지명이며 칠월칠석날 ‘백우산(가리산)’의 남신이 구름을 타고 공작산의 여신을 찾아와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굴운’은 ‘버덩말’, ‘점말’, ‘논골’, ‘큰골’, ‘작은골’, ‘포전’, ‘달밭자리’를 아우르는 마을이다. 그러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은 ‘공작산’과 ‘굴운저수지’이다.
‘굴운저수지’는 ‘큰골’과 ‘작은골’의 물을 받아 가둔 아름다운 저수지다. 큰골과 작은골 사이의 능선이 물에 잠겨 더욱 고적한 풍경을 자아낸다.
‘굴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약산샘물’이 한몫을 했다. (주)태백산음료 ‘약산샘물’이 들어선 ‘민에골’ 주변에는 ‘동굴약수’, ‘샘골’, ‘옥수암골’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공작산에서 ‘민에골’로 내려오는 산봉우리 하나는 ‘약물산<약수봉>’이다.
옛날부터 ‘약물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병이 잘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외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약물산’으로 몰려들어 천막을 치고 장기간 기거하면서 요양을 하였다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근방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바람이 잘 났다고 한다.
왜 바람이 났을까? 샘물 주변의 산세(山勢)는 마치 여자가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과 아주 흡사하였다. 샘물은 정확히 여자의 생식기 자리, 즉 옥문혈에서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옥문영수’였던 것이다. 그물을 먹고 바람이 안 날 수 있을까?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뜻을 모아 샘물이 나오는 구멍을 개가죽으로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 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약수를 (주)태백산음료(사장 박기환)에서 1993년 11월 3일 지하 205m에서 게르마늄 생수 맥을 발견하고 시추에 성공하여 1997. 1. 6일부터 ‘약산샘물’이라는 이름으로 시판하기에 이르렀다.
약산샘물은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여 일본·독일에까지 알려진 샘물이다.
한국기초과학센터, KIST, 일본의 아사이 게르마늄연구소등에서 1차 분석결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게르마늄샘물로 판명되어 그 당시 한국게르마늄학회장 권숙표 박사의 추천을 받아 일본에 수출을 시작 하였다.
그 후 미국바이어가 미국 FDA인정기관 RCH연구소에 의뢰하여 정밀분석결과 48.2ppb의 놀라운 함량을 인증받아 미국에도 수출하게 되었고, 또한 일본최고의 물 연구소 ‘생명의 물연구소’의 마쓰시다 가즈히로 박사는 ‘내가 평생 물 연구로 이런 물이 있으면 좋겠다. 진짜 염원하던 물을 찾았다’며 공장을 방문하여 지질과 환경 등을 둘러보고 ‘이 지역은 앞으로 100년이 가도 오염 될 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약산샘물이 SOD(항산화 효소)활성으로 노화지연, 암, 당뇨, 아토피피부병, 피부상처, 위장병 등에 효과를 보았다는 경험담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건강에 효과가 있는 물로 알려지자 한 병에 10만원이 넘는 사기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약산샘물이 자리한 ‘작은골 민에골’은 ‘동면 신봉리’로 넘나들던 들머리였다. 한국의 100대명산인 공작산의 능선자락이라 골도 많은데 뱀막은 ‘공작산’으로 이어지며 ‘큰부송’, ‘옷바골’, ‘백정에미골’을 지나 내려오면 ‘약산샘물’이 자리한 ‘민에골(밑에골)’이 나온다. ‘민에골’의 약수는 마을에서 ‘고개밑에약수’라 불리웠다. 그러던 것이 약산샘물이 들어서면서 ‘민에골’의 작은봉우리가 ‘약물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심봉고개’로 이어지는 임도는 ‘웃가랑골’에서 시작되고 ‘붓못골’, ‘꼽지랑골’을 지나면 효도원이 자리한 ‘논시네골’이다. ‘잉에성애골’, ‘가랑골’, ‘배나무골’, ‘소모뜨랑골’, ‘배나무골’, ‘잣나무골’, ‘용네미’, ‘전나무골’, ‘작은 붓못골’, ‘심목골’을 지나면 ‘굴운 낚시터’가 나오고 좀 더 내려오면 ‘굴운저수지’다.
‘큰골’은 ‘굴운저수지’에서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버덩말’을 지나 ‘논골’ 어귀에서 개울을 따라 ‘큰골’로 들어왔다. 따라서 큰골 사람들은 저수지를 막을 때 다리가 놓아준다는 다짐을 받고 승낙해주었지만 다리는 놓이지 않아 아직까지 ‘지로고개’를 넘어 돌아 다녀야 했다.
‘큰골’은 ‘공작산’으로 이어지는 산행들머리이다. 그러나 오르는 길이 험해 하산 길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큰골의 뱀막인 ‘박쥐골’과 ‘절토골’은 공작산 턱밑이다. ‘절토골’을 따라 능선을 넘으면 ‘동면 궁지기’가 나온다. 공작산의 단풍이 햇살에 반짝인다. ‘절토골’의 ‘지천석폭포’소리에 단풍잎이 날려 떨어진다. 큰골의 물줄기는 ‘공작산 태드렁’에서 시작된다.
공작산 턱밑에 ‘작은 공작산(딴봉산)’이 있다. 작은 폭포와 줄베이(바위능선의 산)의 ‘설악골’이 그 사이로 이어진다. ‘시거리’를 지나 내려오면 ‘작은 공작산’ 앞의 ‘더갑’이고 그 위쪽의 너른 둔덕은 ‘덕두리’다.
골이 깊은 만큼 골짜기도 많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용석환(78)씨는 그 골짜기들을 다 기억해 낸다. ‘홀통골’, ‘질작골’, ‘내삼포 노내골’로 넘나들던 ‘청량골’과 석이버섯을 따러 다녔던 ‘큰터’의 ‘석이자봉’, 호랑이가 춘샘이를 물고 갔다는 ‘엄장골’ 그리고 ‘느락골’ 그 안으로 이어지던 ‘방아골’, ‘노쟁이’, ‘노녹골’, 메기를 잡던 ‘아갈바위’, ‘은행나무골’, ‘집도골’, 지금도 밭 가운데 죽은 느릅나무가 서있는 ‘서낭당’, 그리고 가끔씩 낚시를 드리우고 앉았던 ‘독가마골’ 등 나와 함께 살아온 신토불이(身土不二)인데 어찌 잊을 수 있냐며 들려주신다.
‘굴운저수지’에서 바라보는 ‘버덩말’의 들녘은 황금빛이고, 저수지 수면에는 잠긴 공작산 단풍 빛이 붉게 물들인다. 저수지아래 '승지골'에도 저녁햇살이 깊이 파고들어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인다.
다리를 건너 ‘논골’로 들어섰다. ‘논골’ 어귀에는 ‘홍천잔치마루’란 전통 떡집이 있다. 잔치마루의 ‘두텁떡’은 노원호, 강미정 부부가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드는 ‘전통 궁중 두텁떡’이다. 노원호씨는 홍천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었는데 강원도 농업기술원의 ‘미래농업대학과정’ 교육을 받으러갔다가 귀농한 강미정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한국 전통 떡 만드는 법을 전수받은 어머니의 솜씨에 반해 어머니의 지도하에 다시 전수받았다고 한다.
홍천의 수라쌀과 직접 수확한 수리취와 쑥을 사용하여 손으로 빚어 만드는 노원호씨의 궁중 두텁떡은 홍천의 각종 문화행사와 서울 과천 경마장에서 인기 있는 먹거리로 소문이 나있다.
‘두텁떡’은 손처럼 두텁다 하여 붙여진 떡 이름이다. 임금님의 탄신일에 늘 올랐던 떡 가운데 가장 귀한 떡으로 ‘봉우리떡’, ‘후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잘 익은 녹두분을 꿀과 함께 잘 섞어서 유자청, 잣, 밤, 대추, 호두를 고루 버무려 떡 속을 만든 후 100%찹쌀에 싸서 만든다. 특히 유자청을 잘 갈아 속을 채워 향긋한 유자향이 일품이다.
‘노원호의 궁중 두텁떡’은 직접 삶고 볶은 팥과 호두 잣 등 견과류 알맹이가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논골’로 들어서다가 ‘고사리봉’ 등산로 이정표를 보고 고사리가 많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고사리봉’이 아니라 ‘고시랑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본래의 지명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논골’로 들어서서 ‘짤뚝고개 서낭당’을 지나 ‘점말’로 들어선다. ‘점말’은 옹기를 빚던 곳인데 이곳에서는 ‘꺼먹이’(유약을 바르지 않고 얇고 가볍게 빚은 질그릇. 검은 빛이 남 : 시루 자배기 물동이 등)를 주로 빚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던 천주교인들은 한때 박해를 받아 ‘내촌 물걸리 장수원’으로 들어가 ‘점말’을 이루고 옹기를 빚었다고 한다.
‘논골’ 너머로 ‘큰가람’, ‘재경골’, ‘조승지’, ‘안동막’이 ‘무레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논골’에서 ‘본말(버덩말,웃말) 보리밭논’을 지나 ‘아랫말’로 나왔다. 경로당에 들려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응달말’을 휘돌아 ‘와동’으로 넘어가는 ‘소니고개’를 넘었다.
이제 홍천읍내로 들어왔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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