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리’의 ‘잣’은 홍천군의 오대 명풍 사업으로 계속 추진 중이다. 이에 발맞추어 '풍천리'에서는 ‘산촌 테마마을’을 추진하고 있다.
  산과 산으로 이어지는 잣나무 숲과 거미줄처럼 연결된 임도는 흥미와 스릴을 즐기는 현대인들의 레저 활동과 접목시킬 수 있고, 임도를 따라 돋아나는 자연산 산채와 나물은 ‘풍천리’ 산촌마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작은도심이’의 ‘누에농장’과 ‘큰도심이’의 ‘까르돈(cardon)’을 연결하는 산촌체험 클러스터를 갖추면 환상적인 테마여행지가 될 것이다. 
  ‘풍천리 장재울’에는 발명가 한분이 10년 넘게 살고 있다. 카이스트 출신의 공학도이며 화가이자 건축가이자 진공관 앰프 마니아이기도 한 ‘송인관(61)’씨다.
  최근에는 ‘그린에너지’ 일환으로 하이브리드시스템을 이용한 ‘전통 한옥 온돌(구둘장)’의 따듯함과 ‘축열식 온돌’을 발명 특허 내고 실용화 사업에 들어갔다.
  또한 ‘큰도심이’의 ‘까르돈’은 야생동물의 생태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체험장이다.
  이러한 삶의 주인공은 야생동물 자연다큐 감독 ‘최기순(47)’씨다. 그의 사진에서는 ‘맹수의 숨소리까지 들린다.’, ‘러시아의 바람까지 느낄 수 있다.’
  지난 20여 년간 생태환경과 야생동물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였으며, 대표작으로 ‘시베리아 호랑이’, 반달곰 ‘미샤와 마샤’, ‘불곰의 땅 캄차카’ 등이 있다. 한국방송 촬영감독상 대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한국 프러듀서상 촬영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한국 최고의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들의 삶은 농촌이라는 한계를 넘어 자연으로서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이다. 과학과 원시성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들의 공통분모는 ‘자연 그대로의 삶’이다. 그 바탕은 생명에 대한 아름다움에서 출발한다.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이지만 그 생명은 따듯하고 힘이 넘친다. 아름다움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움에 대한 욕구를 부추긴다.
  아름다움은 생활 속에서 깃든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어야 한다. 평범함 가운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하며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본능이다. 미적 본능을 살려내는 일이 예술에 대한 진정한 태도가 아닐까?
  공짜나 무료로 이루어지는 놀이형 체험문화가 아니라 몸으로 부대끼고 느끼는 삶의 문화가 펼쳐져야 한다. 그 삶의 모태는 바로 자연이다.  
  인간 중심으로 볼 때 자연의 모든 존재들은 불편해 보이지만 이 땅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저절로 사라진 존재들보다 인간에 의해서 사라진 존재들이 더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책임을 이제는 인간이 져야한다. 뭘 하라는 건 아니다.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는 일이다. 이들의 삶은 본질적인 문제에서 시작하여 우주적인 차원으로 진행된다.  
  최기순 감독이 자리 잡은 곳은 ‘큰도심이’다.
  ‘도십(都十)리’가 ‘도심(道心)리’로 가는 길이라 여겨진다. 기와집말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개울과 길은 마임 펜션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다. 도심이로 가는 길은 약수쉼터에서 들어가게 된다.
  ‘약수쉼터’는 ‘기와집말’과 ‘무수터’ 경계에 자리한다. 또한 ‘도심이’와 ‘기와집말’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이룬다. ‘와가교’를 건너면 ‘무수터’고 개울을 따라 길을 접어들어 ‘도심이다리’를 건너면 골 깊은 ‘도심이’다. ‘도심이’는 원래 ‘북방면 성동’ 땅이었다. 그러나 북방을 가려면 ‘성동’을 거쳐 고개를 넘고 넘어 다녀야하는 먼 길이라 1995.7.26 ‘북방면 성동리  도심이’가 ‘화촌면 구성포리’로 편입되었다.
  예전에 ‘성동리’로 넘나들던 고개는 ‘도심이’를 이루는 골짜기마다 입으로 전해지는 고개로 남아있고, 지금도 임도로 유지되고 있다.
  아직 마을에는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전기가 들어온 것도, 도로가 포장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오지였다. 
  ‘약수쉼터’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도심이’로 들어섰다. 바위 아래 물가에는 물놀이하는 가족들이 막바지 여름을 즐기고 있다. 일단 다리를 건넌다. ‘풍천천’을 건너는 다리다. ‘도심이’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다리 아래쪽으로 흘러든다.
  암반 위를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가면 ‘도심이’다.
  홍천군의 지명 유래에는 ‘도침리(都沈里), [도십리(都十里)]: 기와집말 서북쪽, 화촌면에서 서북쪽 제일 끝에 있는 마을.’이라고 되어있다. 산속 깊이 자리 잡은 마을이다. 십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고, 다시 십리를 걸어 나와야하는 마을이다. 도심이가 된 건 발음대로 표기한 때문이다.
  ‘도심이’ 어귀부터 서북쪽으로 난 골짜기는 ‘성동’이나 ‘북방리’로 이어진다. 고개는 대룡산에서 이어지는 긴 능선을 넘는 길이었다.
  큰 골짜기라면 ‘갈골’과 ‘노쟁이’, ‘뒷골’, ‘병막골’, ‘새골’, ‘대책골’, ‘큰골’을 꼽을 수 있다.
  ‘병막골’을 조금 지나면 임도가 산 중턱으로 이어지고, 임도 아래 골짜기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서면 ‘도심이’의 막창을 이루는 '큰골' 어귀에 닿는다. 
'큰골'의 막창은 '설통바위골'이라고 한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벼랑 곳곳에 벌통을 놓았다고 한다. 임도가 지금은 '덕밭재'와 '북방리(강원대 학술림)'로 이어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성동'과 '도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대룡학교'를 다녔고, 등본이라도 한통 떼려면 북방까지 고개를 넘어 걸어야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이 정해졌다. 우선 임도를 따라 들어섰다. 임도는 큰골 쪽으로 능선을 따라 올라서더니 산중턱을 돌아 돌아 8부 능선까지 오른다. 거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길은 다시 갈라지고 한 길은 고개를 넘어가고 다른 한 길은 '덕밭재'로 향한다. 고개를 넘어 이어지는 길은 북방쪽이다.
  고갯마루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첩첩산중이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이어졌다 끊어진다. 이 길은 북방을 이야기할 때 다시 넘기로 하고 ‘덕밭재’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마을도 안 보이고 잣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몇 구비를 돌았을까. 멀다. 다시 돌아서서 ‘큰도심이’로 내려왔다. 골 막창쯤 되는가 보다. 물소리를 들으며 잣송이를 주워 잣을 까먹으며, 또 산꾼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일도 산행의 즐거움이다. 싸리버섯도 따고 운 좋으면 능이도 딴다. 송이도 돋을 때가 되었는데 ‘아직’이란다.
  임도에서 내려서서 지나온 골짜기를 물으니 큰골이라고 한다. 도심이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물이 시작되는 골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큰골을 넘어 북방면 성동으로 넘어 다녔다고 한다. 그 고개가 ‘보리울고개’라 한다. ‘보리울고개’는 ‘큰골’에서 ‘성동 대룡초등학교’(지금은 화계초등학교 대룡분교)뒤로 넘던 고개다. 아이들은 새벽밥을 먹고 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가다보면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 함께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임도가 나있어 차로도 넘나들 수 있지만, 오로지 두 다리로 걸어 다녀야했던 시절에 길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자신의 미래를 꿈꾸어야 했던 터전이었다. 그때 그시절의 아이들은 지금 어른이 되어 유년의 삶이 그리워질 때마다 찾아온다. 그 길을 다시 걸으며 철마다 먹을 게 많았던 시절에 문득 생각이 잠기곤 한다. 지금 이맘때는 다래와 머루가 익었다고 한다. ‘큰골 보리울고개’에서 내려오면서 ‘설통바위’를 지나고 ‘홀아비골’을 지나면 ‘갈밭골’이다.
 ‘갈밭골’에는 갈(갈대/갈참나무)이 많았다고 한다, 생각나는 건 작은 귀틀집에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다섯인가 여섯인가 되었는데 학교 갔다 올 때쯤이면 아이들이 바가지에다가 뭘 담아가지고 나와 먹곤 했는데 맏딸 쯤 되는 애는 그게 창피해 소리 소리치던 일이 기억난다고도 했다. 다시 ‘모단’을 지나니 둔덕과 개울가에 자리 잡은 집들이 보인다. 개울가의 소나무가 멋들어지다. 둔덕 아래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올라가니 조그만 연못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연못에는 읍내 사람들이 모여 낚시대회를 한다. 연못의 주인도 낚싯대를 드리웠는데 고기들이 주인도 몰라본다고 너스레를 떤다.  
  ‘대책골’을 지나내려오면 ‘새골’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무레이’인데 골이 깊고,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큰골’에서도 물이 가장 흔해 베농사(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논은 보이지 않고 깊이 파인 개울 양편 둔덕 밭에 들깨 꽃이 한창이다. 임도를 따라 올랐다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려왔던 길 옆 옥수수 밭에서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어미소를 따라 송아지가 운다. 이 소들은 쟁기질을 하거나 우마차를 끌어야하기 때문에  지금 훈련 중이라고 한다. 외양간에 묶여 사료를 먹으면 힘을 못 쓴다고 밭에다 풀어놓아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어먹어야 다리에 힘이 붙어 일을 잘한다고 한다. 병막골 어귀의 고집스런 농사꾼의 이야기다.

워낭이 운다
고삐를 끌고 옥수수밭으로 가며 운다 고삐가 돌에 걸리자 늙은 농부는 돌을 치워 고삐를 벗겨준다 아니 목덜미에서 아예 고삐를 풀어준다 걸음을 멈추었던 소가 다시 워낭을 흔들며 간다 두벅 두벅 앞서 걷고 노작노작  따라 걷는다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워낭을 한번 흔들어 댄다 알았다 가마 어서 가마 궁뎅이짝에 붙은 똥을 떨어주고 털갈퀴로 긁어주자 고개를 돌려 뻔히 바라본다 저 눈에 온 하늘이 다 담긴다 목덜미도 긁어주고 쓰다듬어 준다 머리를 들어 워낭을 흔든다
그만해라 이눔아
긴 꼬리로 제 엉덩이를 치며 풀을 뜯는다
나직나직한 워낭소리 온 밭에 가득하다
                                                                                
                                                               -소-

  소가 사람과 살면서 사람의 말을 다 알아 듣는다고 한다. 옛날 하루 종일 소와 쟁기질을 하고 나서 멍에를 벗으면 자신의 목덜미에 얹었던 멍에를 오래도록 바라본다고 한다. 그때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안아준다고 하는데 그제야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고 한다.
  오래도록 함께 살면서 나눈 이야기라고 한다.
  ‘화(숯)가마골’을 지나 ‘동방골’을 지나면 ‘뒷골’ 어귀다. 전봇대 옆에는 '가르돈'의 다양한 야생 생태체험 프로그램이 쓰인 안내판이 서있다. 개울을 건너 ‘다락골’어귀의 논두렁을 지나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클락션을 울리지 마세요’라는 안내판이다.
  오솔길을 따라 연못과 전시실, 강의실이 숲과 잘 어린다. 탐사팀이 찾아간 날 최기순 감독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뱀에게 물렸다는데 강의실에서 카메라 촬영기법을 설명한다. 야생동물들의 삶터 ‘가르돈’은 ‘부채바위골’을 따라 펼쳐진다. 
  까르돈(cardon)은 자연보호구역 안에 있는 간이 연구소라는 뜻으로 보호구역 안에 들어와 생태를 연구하거나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공간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공간은 이정표. 마이크로 생태관, 생태관찰관, 원격탐사, 내가 찍는 숲 이야기, 생태사진 전시관, 까르돈 시네마 등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까르돈 생태체험장’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람부터 느낌이 다르다. 야생의 느낌이랄까? 일단 뱀이 살고 있다는 푯말에 긴장하게 된다. ‘가르돈’은 생태 관찰을 통하여 자연과 친해지는 과정이다. 야생동물의 습성을 알아가는 일부터 자연의 생명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채집한 곤충들을 마이크로 카메라로 확대해서 관찰한다. 자신의 카메라로 생명의 신비를 직접 관찰하고 촬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부싯돌로 불 피우기,나무침대를 이용해 공중에서 자연관찰하기, 자연과 어울리는 생태집 만들기, 다양한 야생동물 발자국 그리기 등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한다.
  ‘가르돈’은 야생체험을 통해서 생생한 자연 속에서 창의적으로 생존하는 방법을 경험하고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다는 강인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자연과 더불어 공존 공생할 수 있는 자연인으로써 자라날 수 있도록 마련한 진정한 삶터이자 체험장이다.
  최기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오래전에 사라진 짐승들의 울음을 들은 것 같다. 삵은  벌써 찾아왔다고 하고 한여름이면 반딧불이가 저녁 어둠을 밝히며 난다고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람에게 쉴 안식처가 필요하듯이 숲의 주인인 짐승들에겐 자연이 깃들 숲이 필요하리라. 
  ‘품목골’을 지나 ‘도장골’ 어귀에는 ‘사발소’라는 큰 소가 있었는데 장마에 묻혔다. ‘노쟁이골’로 들어서면 ‘뒷방고개’와  ‘붉은배기’가 나온다. 예전에는 북방, 춘천으로 다니던 큰 고개였는데 ‘뒷방고개’를 넘으면 성동 ‘절골말’이 나오고 ‘붉은배기’를 넘으면 ‘용태울’이 나온다고 한다. ‘갈골’은 ‘큰도심이’어귀의 첫 골짜기다. 화전민들이 떠나고 다시 이골짜기를 찾은 사람들은 난을 키웠다고 한다. 그 후 버섯을 재배하였다고 한다. ‘갈골고개’를 넘어 성동으로 넘어 다녔다는 길이 지금은 임도로 연결된다.
 ‘큰도심이’를 돌아내려오면서 땀에 젖었다. ‘도심이’내치기 ‘망건소’에 풍덩 뛰어들었다.
  어이 시원하다. 마을사람들은 이 소를 ‘누치소’라고도 하는데, 이야기는 망건소와 누치소가 함께 얽혀있다. 어느 날 선비가 이 소를 지나게 되었다 바우벼랑을 끼고 도심이로 들어가다가 물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누치를 보았다.
  누치는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놀라 몸을 숨겼는데 누치를 찾아본다고 물속을 내려다보던 선비는 그만 망건을 빠뜨리고 만다.
  이 광경을 지나가던 도심이 사람이 보고 망건을 건져주었다고 하는데 그후 마을사람들은 망건소 또는 누치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치는 보이지 않고 산그늘 짙은 개울가의 물 놀이터다. 
  여울 한가운데 돌담 쌓아있다. 어항이 놓여있다.
  갈겨니와 돌고기가 햇살에 비늘을 떨어낸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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