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고개-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진 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풍암리 뿐만 아니라 청량리 군두리 어론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면사무소에서 심형기 번영회장을 만나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자작고개를 향한다. 서석면사무소 앞뜰에는 두개의 비가 서있다. 현감 민태호와 군수 원세기의 선정비다. 민태호는 1884년에 홍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1
서석에는 제비가 많다. 공기도 좋고 물이 좋아 지붕을 맞댄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쉴 새 없이 날아든다. 제비가 찾아오는 마을에는 인심이 나고 풍년이 든다했던가?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자작고개로 올랐다. 시장을 보려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올라야 한다. 바로 자작고개가 그런 곳이다. 또한 동학군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항전을 펼친 곳이다. 서석면 면사무소 앞
감두리는 풍암리에 속한다. 풍암리의 섬 같은 곳이다. 숲이 있고 전설이 깃든 마을이다. 산 아래 자리 잡은 집 창문너머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일부러 밤 풍경을 보고 싶어 풍암 시장에서 순대국을 먹고 어슬렁거리다가 강을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청량에서 내려오는 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듯 흐른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달빛을 안고 흐르는 강물소리를 듣는다.
다시 ‘거릿말’로 나와 ‘삼연대’로 들어섰다. 청량분교와 보건진료소가 마주하고 있다. 큰 뜰이라는 이름의 ‘거리’는 길을 사이에 두고 음지·양지로 나뉜다. 개울은 응달말의 논을 지나 산 밑으로 흐르고, 양지말은 수리봉과 연화봉의 긴 능선 아래 뜰을 이루고 그 사이로 실개천이 돌아 흐른다. 넓은 뜰은 동수교 다리까지 이어진다. 동수교부터 개울은 왼쪽 골짜기
토요일이다. 날씨가 청명하다. 오랜만에 물걸리를 돌아 청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강에는 가족과 함께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여자들은 물에 몸을 담그고 다슬기를 줍는다. 여름이면 익숙한 풍경이다.차도 강가에 들어선다. 짐이 많은 탓이겠지만 강에까지 차가 들어간다면 문제다. 물걸리를 지나오면서 어림짐작으로 헤아려도 백여 대는
청량(淸凉) - 말만 들어도 시원하다. 들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모자를 푹 눌러쓴 아낙네들의 이마에 땀이 흐른다. 노란 물장화를 신고 허리춤엔 비료포대로 만든 주머니를 매달고 한손엔 모춤을 잡고, 이앙기가 빠뜨린 모를 꽂는다. 하루종일 쫓아 다니며 모를 잇는다.곁두리 때를 맞추어 마을을 지나다가 참을 얻어 먹었다. 예전에는 모심는 날이면 잔치 분위기였다
폭포산으로 오르는 길은 두갈래이다. 버들구미에서 양지말로 오르는 길과 응달말에서 모둘자리를 지나 오르는 길이다. 나는 양지말이라 부르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양지말 어귀는 버들구미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실버타운이 조성돼 있다. 옛날에는 아득한 골짜기였고, 어귀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그 자리에 삼생정보화센터가 있다. 앞으로 삼생마을농촌체험관도 운영할 계획이라
효제골을 돌아 나왔다. 옛날에는 구불구불 돌아 흘렀을 개울이 직선으로 흘러내린다. 그늘을 드리운 나무도 없고 아이들 물 놀이터도 없다. 흐르는 물을 막아 양수기를 대고 물을 퍼 논에 댄다. 다시 국도에 올라섰다. 논 사이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다리를 건너면 군두리다. 왼편쪽 소나무 숲이 있고 사이에 비석이 서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 위에 세워졌
생곡저수지를 돌아 내려온다. 연화봉과 옥정봉을 이어 막아 물을 가둔 저수지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 피리골에선 딸을 시집보낼 때 쌀밥 세끼를 지어 먹여 보내면 부모의 도리를 다했다 할 정도로 쌀이 귀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 저수지를 막는다고 할 때 모두가 팔을 걷어붙일 정도였다. 저수지는 꼭 필요했다. 이 저수지 물은 상군두리 뜰과 도찬리, 용터, 사
배나무골은 구목령 도실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구목령으로 오르는 구비에 아름드리 돌배나무가 아홉이 있다하여 구나무재(구목령)라하는데 지금은 큰 돌배나무는 보이지 않고, 살 냄새 같은 배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그 어귀에 지금은 지갑부(75)씨가 산다. 피리골 토박이로서 맨 끝집이다. 수돗가엔 볍씨를 담근 큰 고무함지가 있었고, 물이 담긴 논에서 두둑을 지
‘모두부치’ ‘진펄’ ‘마당대기’를 찾는 데는 즐거움이 컸다. 그 마음으로 강물줄기를 따라 하루 멀다하고 나섰다. 홍천강은 맑은 물과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있어 사계절 찾는 곳이다. 그러나 백사장은 찾기 어렵고 홍천구경(洪川九景) 뿐만 아니라, 물골안 유원지, 눌언동 유원지 등 홍천강 상류지역의 강은 여기저기 쌓인 돌무더기로 사람들의 발길에서 멀어지고, 포크
장골을 나왔다. 아침에 흐렸던 하늘이 서광동을 들어서면서 햇살을 비추더니 저녁때가 되어 해가 아미산 위에 걸린다. 논보다 밭이 많은 골짜기에선 비닐 씌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골짜기가 보인다. ‘서광동’이다. ‘서광’은 매봉산(이 마을에서는 매봉산이라 부른다)줄기의 골짜기이다. 산 능선이 에두른 골이다. 지금 그 어귀에는 아담한 집이
날이 흐리고 비가 왔다. 쉬지 않고 뱃재고개에 올라서니 간간이 눈발이 섞여 날린다. 해발 600미터의 뱃재는 아직 봄 몸살을 앓고 있다. 철이 철이니 만큼 비닐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감자를 심을 거라고 했다. 다시 돌아 ‘구부소’에 사는 이근재(70)씨 댁을 찾았다. 마당에는 땔나무로 쌓아놓은 참나무 등걸이 가득하다. 한편에는 말코지를 깎아 세워놓았다
장가들어 장백골로 세간을 나고 거기서 화전을 일구며 젊음을 보낸 이근재(70)씨는 지금 구부소께 살고 있는데, 미약골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신 분이다. 아내와 단둘이서 살고 계셨다. 사월이 지나 오월이 돼야 서리가 걷힌다는 미약골은 바로 내면과 서석, 평창 봉평의 경계를 이루는 ‘모두부치(주걱대기)’-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흥정능선의 최고봉-에서 시작된다.
저녁에 비 내리고 아침에 햇살이 들었다. 산마다 골마다 안개를 풀어 올렸다. 춘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은 얼음을 풀어내는 듯 했다. ‘미약골’을 향하여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44번 국도와 56번 국도가 교차되는 구성포 신내 사거리에서 오른쪽 56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농사준비로 바쁘다. 논을 갈고 비닐을 걷어내고 허접쓰레기를 태우는 연기가 박무처럼 낮게 퍼
완연한 봄이다. 하루 햇살을 받아 푸른빛이 서린다. 산에는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산수유꽃이 화사한 빛을 더 한다. 산기슭엔 진달래가 한창이다. 논두렁 밭두렁엔 꽃다지도 꽃대를 밀어 올린다. 봄의 들녘은 이제부터 푸른빛으로 무르익는다. 홍천을 휘돌아 흐르는 강. 홍천강은 큰 강이다. 덩치 뿐만 아니라, 많은 샛강을 거느린다. 산 구비 구비 마을 안팎을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루하루 날씨는 수은주를 한 눈금씩 밀어 올리며 봄을 향하고 있다. 등산화에 카메라, 간단히 먹을 점심을 챙겨 길을 나서는 마음은 늘 설렌다. 춘분- 봄의 문턱을 넘어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날이다. 날씨는 온화하고 따스하다.얼음축구로 들썩였던 얼음장은 스스로 몸을 풀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눈치와 마자떼, 은빛비늘을 반짝이는 피라미떼가 물살을 따라 지느러미를 흔든다. 연봉다리에서 내려다보는 해빙의 강 물결이 햇살에 반짝인다. 강은 하늘의 푸른빛과 조우하며 서서히 안개를 피워낸다. 잠시 대동여지와 홍천군지(1989
제13회 중부권광역 자치단체(강원, 경기, 충남)공무원 친선 축구대회가 11월3일 오전 10시 북방공설운동장에서 중부권 공무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중부권 공무원 축구대회는 강원, 경기, 충남도청 공무원들이 매년 개최지역 자치단체를 방문, 축구경기를 통해 실질적인 교류증진과 지역정보교류를 통해 화합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마련된 행사로서 올해
아시아나항공의 김수천 상무를 비롯한 직원 40여명은 지난 10월27일 1사1촌 자매마을인 화촌면 외삼포2리를 찾아 농촌일손 돕기 봉사활동을 전개했다.특히 이날 행사에서 아시아나항공은 빈프로젝트를 외삼포2리 이장에게 전달하였고 외삼포2리 이장은 청정지역인 외삼포에서 생산한 발아현미를 전달하는 등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유대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화합의 장을
옛날 아주 옛적에 노천땅 솟배기라는 곳에 두 아들을 둔 홀아비 홍씨가 비록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남달리 효성심이 많은 두 아들은 아버지를 봉양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므로 그 효성심이 인근 마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이 집안에 불행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홀아비 홍씨는 원인도 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두 아들은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좋다는 약이나 명의를 찾아다니며 온갖 정성을 다하였지만 아버지의 병은 별다른 치도가 없었다. 그날도 형제는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