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대’에서 ‘어은동’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다. 간다면 못갈 게 없지만 좀 고생이 따른다. 강을 건너거나 산 밑을 돌아가야 한다. 한때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나무들이 길에 들어섰다. 이 길은 자연으로 가는 길이다. 길이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 주는 통로다. 두개 이상의 길이 합쳐져 정리된 길은 도로라고 부른다. 또한 어떤 상
‘가래울’과 ‘논골’을 하루에 돌아보았지만 가래울로 건너는 섶다리를 쓰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쩔수 없이 논골은 ‘응달떼소’, ‘솔경지’, ‘삼선대’와 함께 떠나는 행선지가 되었다. 답풍리는 큰 단풍나무들이 많다 한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큰 단풍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단풍보다 더 고운 단풍 빛의 나무들이 산과 긴 강가의 한 풍경을 이룬다. 햇살
이튿날 아침 바람이 불고 눈발이 거세다.도관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대서소에 들렸지만 문이 잠겨있다.장거리에서 다리를 건너 당고개를 넘었다. 당고개 밑은 당벌이다. 지금은 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말하지만 중학교가 들어선 버섯고지와 거주포 언덕 아래쪽 ‘안골(안고래)’을 아우르는 너른 버덩이다. 당벌뜰은 하도 넓어 물이 늘 모자랐다. 고심고심하다가 우
채비를 갖추어 다음날 다시 찾았다.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올 들어 가장 추운 추위라 했다. 이런 날이 오히려 반가울 수가 있다. 전설을 따라 백우산에 오르는 길은 색다른 경험이다. 좀 소설적인 이야기가 될 듯 싶지만, 그러나 사실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용마의 흔적을 되집고 가는 길이면서 주인을 찾
첫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길을 나섰다. 길에서 첫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일까? 바람이 불고 쌀쌀한데도 도관동으로 향했다. ‘서곡’이 서곡대사의 탄생으로 붙여진 마을이라면 ‘도관동’은 ‘관을 쓴 사람이 지나간 길’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이다. 그럼 관을 쓴 이는 누구일까? 그것도 촌으로 촌으로 숨어들어 지나가야 했을 인물이라면 누굴까?
서낭고개 아래 펼쳐진 뜰은 안실의 버덩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후두둑 후둑 메뚜기도 날뛴다. 최근에는 웰빙(Welbing)이다 뭐다 하여 메뚜기도 남아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메뚜기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메뚜기를 많이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학교가 끝나고 일삼아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에 입맛을 돋우고, 기관지, 천
‘상여집이야, 상여. 그것도 몰라?!’ 도방골은 바로 상여집(곳집)이 있는 골이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상여를 메고 장사를 지낸다. 마을 입구나 으슥한 곳에 서있던 상여집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다. 왠지 을씨년스럽고 뭔가 나올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장례행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영여(靈輿)와 상여(喪輿)다. 영여는 상여에 앞장서서 가는 작은
아홉싸리고개 쉼터에서 ‘장양차’를 마신다. 하루를 뜨겁게 산 태양이 어둠의 서곡을 펼치듯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이 붉다. 단풍의 불길은 차츰차츰 마을로 내려가고 산마루의 노을은 어둠에 스민다. 어둠을 밟고 길을 내려온다. 진거리로 가려면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서야 한다. 는개(짙은 안개)가 내리고 이슬이 맺혔다. 다시 와야 삼거리를 지나 진거리에서 내렸다
경계에는 산이 있고 강이 있다. ‘모든 경계엔 꽃이 핀다’고 말한 시인도 있지만 꽃이 피고지듯 흐르는 삶에는 경계가 없다. 나는 경계를 넘어간다. 물은 경계를 뭉개며 길을 연다. 이 작업은 소통의 시작이며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와야(瓦野)-기와를 굽던 마을이 들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안말’, ‘망전’, ‘비선동’, ‘도둔터’, ‘수작골’, ‘깨뜰’
가을걷이도 다 끝나가는 계절이다. 이때쯤이면 떡이 먹고 싶다. 강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먹는 얘기 좀 해야겠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우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먹거리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떡을 해먹었다. 그 덕에 내 몸에는 떡의 맛이 배어들었다.
‘서가터’ 어귀에서 둑방 길을 따라 걸으며 산을 바라본다. 멀리서 바라보니 표정을 느낄 수 있다. 서로 닮은 산과 강이 부여안고 흐른다. 저만큼 살다보면 닮고도 남겠다. 강 건너 ‘망재봉’과 ‘동막골’-‘탑둔지’-‘동창’-‘복골’로 이어지는 은장봉의 능선은 선녀가 벗어놓은 치마처럼 부드럽고, 동호골-가루개고개-척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화가 잔뜩 난 개구쟁
‘탑둔지’는 절이 있던 자리다. 동창초등학교 옆 대승사(大乘寺)라는 간판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절이 나온다. 뒷둔덕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다시 내려와 ‘기미만세상’을 지나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한쪽으로는 ‘복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다리가 놓여있다. 농가 텃밭에선 창 넓은 모자를 쓴 아낙이 참깨를 베어묶어 세우고 있다. 농가 앞을
‘벼락구미’는 수하리와 물걸리의 경계를 이루는 기암절벽의 산기슭을 말한다. 바로 밑은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옛날 이곳에 물귀신과 도깨비가 자주 나와 춤을 추며 괴성을 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밤길 다니기를 꺼려하였던 곳이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벼랑길로 오르락내리락 왕래할때 한 해에 한 명씩 물에 빠져 죽거나 강가에 소를 매어 놓으면 소가 물속으로
추석이 지나고 홍천에서 벌이는 축제가 계속 이어진다. 한우인의날 행사와 너브내 단호박축제, 강원인삼축제, 사랑말축제 그리고 한서제다. 짧은 시간에 다섯개의 행사를 찾아 즐기는 일 또한 벅차다.주말에는 단호박축제 구경을 다녀왔다. 면단위에서 벌이는 먹거리 축제로써 올해로 두번째이다. 행사장에는 볼거리뿐만 아니라 즐길거리와 머물거리가 다양하였다. 특히 올해는
행치령 고개 너머 구비에는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마의태자 노래비’가 있다. 노래는 ‘행치령 고개 너머 백자동 고개 너머 산새도 오지 않는 깊은 산골 갑둔리’라고 시작된다. 받침석도 없이 비스듬히 뉘여 세운 노래비 뒤에는 바위가 버티고 있고 그 옆에는 작업대기소 컨테이너가 서 있어 황량하게 느껴진다.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의 생을 보는 듯하여 씁
‘생베’에서 ‘응달말’로 가는 길은 둘이다. 강을 따라 눌언동을 지나가거나, ‘작은 구둔치’(황골사람들은 ‘황골고개’라 한다)를 넘어 가는 길이다. 나는 두길을 답사해야 된다. 가는 길이니 일단 눌언동(누런이)을 따라 내려왔다.눌언동과 항골응달말의 한가운데 우뚝 선 봉우리가 뾰죽봉이다. 눌언동쪽으로는 바위벼랑이며 가파르게 강에 닿아있고 응달말 쪽은 비탈진
여울머리에 발을 담근다. 종아리를 간지르며 흐르는 물살이 감미롭다. 물소리 또한 다정다감한 누이처럼 속삭인다. 아이를 데리고 물놀이 나온 가족인 듯 여울머리에 서서 견지낚시를 한다. 아이는 줄을 풀다말고 소리친다. 고기가 물린 것이다. 줄을 타고 전해오는 고기의 발광이 손맛으로 전해질 것이다. 그걸 즐기는 일이 낚시다. 지금 느낀 그 전율은 ‘진여울’과 함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추억을 나누는 사람이다. 말이 그립고 이야기가 그립다. 잠시 잠깐 서로가 품었던 마음이 박하사탕처럼 가슴에 남는다. 나를 태워준 차는 세레스다. 수하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오이를 심었다는데 자재비에 비료값, 기름값, 인건비가 올라 어렵다고 했다. 오이 하나를 상품으로 만드는데 얼마만큼 손이 가는지 아느냐며, 시름을 털어 놓았다. 용
장마라 하지만 마른장마다. 연일 35도가 넘는 살인적인 폭염을 퍼붓는다. 논밭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고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 등 이상고온이다. 더위에 힘겨운 듯 초록의 생명들도 축 늘어져있다. 길옆으로 흐르는 도랑이나 샘에서 수건을 적셔 목에 두른다.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힌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솔치재를 걸어 넘으려 했으나 오늘 같은 날씨에는 무리다.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햇살의 노래는 담채화처럼 번지고 까무잡잡한 어린 시절은 섶다리를 건너온다 미루나무 잎을 흔드는 바람이나 자갈자갈 흘러가고 흘러오는 물의 노래는 마음 한가운데로 물결진다 물결마다 수천의 얼굴이 묻어난다 너를 생각하며 흘러가는 나를 본다.- 섶다리를 건너며 -추억으로 가는 다리-섶다리는 봄에 놓았다가 장마 때 철거하고 시월쯤에 다시 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