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놓여 있을 때 대인大人의 꿈을 꾸는 선현들의 의기를 만난다. 임진왜란 때 선현들을 만난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그랬고,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이 그랬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임금의 명이라고 생각했고 하늘의 뜻이라고도 생각했다. 의義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라는 초연한 마음을 간직했다. 내 몸 편함은 군신의 의리 저버릴까 두려우니, 백성들을 구제함이 신선되기보다 더 어렵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有召命(유소명) / 망우당 곽재우구년에 양식 없어 밥 짓는 연기 끊기더니어찌하여 은혜의 명령
조선의 제도와 현실이 그렇듯이 여성 인격권은 거의 없었다. 사대부 여성의 권리는 그나마 존중되지만 서민 여권은 그렇지 못했다. 일부다처제를 두면서 차별된 여권은 땅에 떨어졌다. 여성들이 긴긴 밤을 혼자 지새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게다. 동짓달 긴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내겠다는 시상들이 이를 반증하지나 않을까. 북풍은 밤 세워 초막 처마 끝을 맴돌고 있는데, 찬 대나무 몇 그루가 빗소리를 낸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冬夜(동야) / 반아당 박죽서 눈 빛 환한 하늘에 기러기 비껴날고 떨어진 매화 송이 꿈이 더욱 밝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절은 대부분 이 무렵에 지어진 것이 많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병화를 입었다. 대부분 전소되어 흔적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민족의 커다란 비극이었던 6.25남침은 더 많은 병화를 입고 타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오래된 절도 해 지나니 흥망을 느끼게 하네, 거듭 와 보아도 남아 있는 스님들은 다시 볼 수 없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經廢寺(경폐사) / 하곡 허봉묵은 절도 해 지나니 흥망을 알게 하고보고 보아도 남은 스님 볼 수
시인의 시상들은 아마 몇 만 리쯤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타래로 얽혀놓으면 한 섬이요, 지게 짊어지면 거뜬히 한 짐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래의 짐이 많고 무거워 [무제無題]랄지, [우음偶吟]이랄지, [절구絶句]랄지 인색한 제목을 붙이는 수가 더러 있다. 시상은 쏟아져 나오는데 시제를 추스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 겹구름이 내려와 풀 옷을 가만히 적시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絶句(절구) / 백호 임제깊은 밤 숲 속 절에서 잠을 잤더니구름이 내려와 풀 옷을 적시였는
이별의 그리움을 붓으로 쓴다면 한 권의 책이 되었을 것이고, 눈물로 채웠다면 술항아리로 하나 가득 찼을 것이다. 이별하는 그 장면도 마찬 가지이겠지만, 이별하고 난 뒤의 아픔은 더욱 클 수밖에 없으리. 시적 화자가 여성이라면 떨리는 감정이 극에 도달하는 몸부림이었겠고, 남성이었다면 한 말 술도 부족했을 것이다. 옛날의 역 밝은 달빛 아래서 나눈 이별주였다면, 아마도 강남의 소쩍새 우는 그때였을 것이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送人(송인) / 고담 이순인한 말 술로 오늘 저녁 우리 서로 만나서어느 곳에 서로 가장 그리워해야
서산으로 기울던 해가 긴 밤잠을 푹신하게 자고 부스스 눈을 뜨면서 동녘에서 인사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기 위해 동해로 몰린다. 일출日出이다. 오늘 떠오른 태양이 내일이라고 다를 리는 없겠지만 평상시보다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가 새해 해맞이란다. 시인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음력 한가위가 지난날이었으니. 달이 지자 맑은 하늘 동녘 저 멀리 아득한데, 동해 바다 만 이랑 푸른 물결 갑자기 붉게 물든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洛山寺八月十七日朝(낙산사팔월십칠일조) / 동고 최립하늘은 높은데 지는 달은 동쪽에서넓고 넓은 푸른
두 번째 서회는 학문적인 성숙과 가족의 안위였겠다. 예리한 필봉은 이 대목의 서회에서 무디었던 일필휘지는 예리한 칼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니. 남겨놓은 글이 없을 때 무한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다음은 뻔뻔한 후진이 없을 때 앞으로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습이다. 자신이 남겨놓은 흔적과 안타까운 후예의 걱정을 본다. 흥에 겨워 읊고 돌아가니 지금도 남아있는데, 동고에 옮겨 기대어 흘러가는 물을 바라본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獨坐書懷(독좌서회)[2] / 순암 안정복세상일은 구름 같아 모두가 환망이요인심은 거울같이
혼자 앉아 서회를 읊는 시간이 더 없이 즐거웠으리라. 처음은 지난날의 회고다. 질곡의 세월을 딛고 버티어왔던 시간은 희비가 교차되는 엄숙한 시간이었으리니. 남을 위하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혼자만의 물음도 있을 것이다. 질곡의 그림자를 밟는 순간이리니.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나니 별세계요, 영장 일곡은 전생의 인연이라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獨坐書懷(독좌서회)[1] / 순암 안정복 물고기 솔개 뛰고 영장 일곡 인연인데푸른 산 그림자는 지팡
조선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지 않았지만 고려의 전통과 얼이 숨어 있어 불교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스님과 마주 앉아 다정스럽게 대화했고 스님과 함께 곡주도 마셨다. 나라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운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나라를 구한 승장의 본보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 가서 큰 성과를 거둔 스님도 있었다. 삼월 광릉에는 산에 꽃이 가득 피어나고, 맑은 강 돌아오는 길은 흰 구름 사이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贈僧(증승) / 고죽 최경창삼월에 광릉은 산에 꽃 가득 피고맑은 강 돌아오는 길 흰 구름 사이에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다.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이라 일컫는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旱災·水災·兵禍)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달 밝은 문 밖에 물은 쉼 없이 흘러만 가는데, 어느 곳이 진정 무릉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伽倻山(가야산) / 손곡 이달 중천에 뜬 학은 가을밤에 내리고천년의 구름은 하늘에 떠가고 있는데문밖의 물 쉼
나이가 연만해지면 어쩐지 자기 주변을 챙긴다. 사람도 챙기고 물건도 챙긴다. 사람을 만나자고 해놓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사립문이라도 열어두면 어서 들어오라는 표시가 되련만 그마저 차단된 공간을 만든다. 노인의 모습을 보며 쑥덕거리기 일쑤다. [저 늙은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하면서. 꽃 피면 날마다 시골 스님과 만나자고 약속하더니, 꽃 지면 열흘이 지나도 대사립을 닫는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此翁(차옹) / 아계 이산해 꽃 피면 날마다 시골 스님 만나고꽃 지면 열흘 지나 대사립 닫는데모두들
원산에 명사십리는 바닷가 8킬로미터로 펼쳐진 흰 모래밭 해수욕장이 있다. 여기에는 해당화가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붉게 핀다. 이 해당화는 고전소설 《장끼전》에도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한탄 마라. 너야 내년 봄이면 다시 피려니와 우리 님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는 내용이 있다. 몽금포 타령에도 해당화가 나온다. 늦봄이 되어 온갖 꽃이 다 지고 없는데, 안타깝게 해당화만 홀로 남아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海棠花(해당화) / 금원 늦봄에 꽃 지고 해당화 남았는데이제 해당화마저 다 지고 만다면봄날의 일이 헛
굴원과 함께 한 음력 5월 5일에 대한 고사다. 이는 중국에 대한 한 고사이고 우리에게도 월과 일의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 대한 의미를 크게 했다. 정월초하룻날인 1월 1일과 제비들이 온다는 삼월삼짇날, 수릿날이라는 5월 5일의 단옷날, 칠석일의 7월 7일, 중양절의 9월 9일 등을 좋은 시절의 날로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미풍에 의한 풍습이었다. 짙은 구름이 어둑히 먼 하늘에서 출렁이고, 강마을에는 비로소 박초풍이 불어온다고 하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競渡日有感(경도일유감) / 학봉 김성일어둑히 먼 하늘에 구름이 출렁
과거의 회상이 역사를 떠올리게 되고, 과거 회상이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어제라는 한 시점에 서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되돌아보며 내일을 설계하는 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일직선상에 놓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관조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역사는 발전이기 때문이다. 가을 풀이 소복하게 우거진 전조의 절이었는데, 지금은 밝은 비석에는 선비의 글귀만 남아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弘慶寺(홍경사) / 옥봉 백광훈 가을의 풀 속에 전조의 절에서비석에 남겨있는 학사의 문구에유수는 천년을
조선 최고의 가사문학 대가에게도 한가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제를 정하지 못해 마음을 주섬주섬 추스르다가 궁색스런 우음이라고 붙이고 나서 너무 평범한 시제에 자기도 모르게 아차, 했을 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어쩌면 생각이 세심한 것 같기도 하더니만, 단조로운 면을 보이고 있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득히 어느 곳으로 향해 가는가, 자네가 한강에 이를 수만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偶吟(우음) / 송강 정철흐르는 물은 골짜기에서 나오고아득히 먼 곳으로 어디로 가는지한강에 내가
겨우내 잔설殘雪과 함께 시름을 반복했던 산촌에도 매화 손님을 맞이하면서 봄이 찾아왔다. 봄 손님을 맞이하려고 부산을 떠는 모습도 간혹 살핀다. 툇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있던 할아버지도 마당가에 앉아 있는 손주놈에게 이것저것을 시키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하게 한다. 며느리는 장독대를 치우고, 아들은 농기구를 손본다. 냇물에 임한 대울타리는 누구네 집인가 / 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에 드러나 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春日山村(춘일산촌) / 청천 하응림냇물에 대울타리 누구의 집인가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 있는데술 사
인간은 어쩌면 한恨과 눈물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생활해 가면서 실제로 경험하고 산다. 한恨이 있기에, 눈물이 있기에 사랑이 소중한 줄을 알았고, 그에 따른 문학적인 작품이 성숙했는지도 모른다. 이웃을 사랑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이런 사랑에 대한 한이 깊이 자리하였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봄이 이 땅에 돌아왔건만, 가고 싶은 고향 생각은 나날이 새롭기만 하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恨(한) / 취연 일타홍 이제야 봄 오니 고향생각 새로워라마음에 학사님은 풍류객일 터인데오늘
호당은 조선 시대 젊고 유능한 문관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을 닦게 했던 일종의 휴가제인 서재書齋다. 독서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실시한데서 비롯된다.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자택으로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다소 미흡했다. 강 위에는 아직도 해가 떠오르지 않고, 십리나 안개가 자욱하여 어디인들 분간키가 어렵구나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湖堂朝起(호당조기) / 취죽 강극성강위에는 아직도 해가 뜨지 않고안개 속에 자욱하기 십리나 되는
남명 조식(1501~1572)은 61세인 노년에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지었는데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는 곳이고 또한, 본인의 학문을 이곳에서 성숙시킨 곳이기도 하다. 이른 봄이면 남명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남명화가 핀단다. 조식의 문하에서 독실하게 수학했던 시인이 어찌 산천재에 대한 감회와 느낌이 없었겠는가. 깨끗한 달빛 추석의 비단처럼 밝기만 하고, 맑은 물결은 매우 고요하여 물결도 일지 않았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山天齋(산천재) / 개암 강익깨끗한 추석 달빛 비단처럼 밝아 오고맑은 하늘 심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선배는 후배를 기른다. 소질이 있는지의 여부도 알아보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과제를 제시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알아본다. 이것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후진 양성이나 다름없다. 큰 스님이 동자 스님을 기르는 것도 마찬 가지의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후선자後仙子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말없이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바라보니, 산 정상에서는 흰 구름만이 살며시 일고 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後禪子(후선자) / 서산대사 휴정슬픔과 기쁨은 베개 속의 꿈일 뿐만남과